#11. 사랑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

- 지호와 선우의 이야기 11

by 장해주

그저 흐르게 두자니. 사랑인데.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이대로 정말, 끝내자고?”


선우의 낮은 음성이 지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지호는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더 이상 선호를 마주 볼 수 없었으므로.

선우가 그런 지호를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은 지호의 두 눈에서 살갑던 인영이 지워졌다. 온기가 감돌던 손이 금세 식었다. 멀어지는 그의 조용한 걸음만이 선명하게 귀전에 새겨졌다. 선우가, 지호한테서 옅어졌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지호.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자리에 황망한 눈동자만 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식지 않은 선우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를 놓쳤다. 아니, 놓아버린 게 맞겠지. 그렇게 얼마간 망연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때였다.

타악- 둔탁한 소리가 지호의 뒤로 울렸다. 이영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지호 쪽으로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나, 문 닫을 건데.”


지호의 눈꺼풀이 느리게 두어 번 껌뻑였다.


“어...? 아..! 응, 싸장... 미안해.”


하아. 엉망이 된 지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영이 옅은 숨을 뱉었다.


“지호 씨. 내 가게에는 마감이란 게 있어. 그리고 마감이라는 건, 비단 여기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


지호는 조금 놀란 눈으로 이영을 쳐다봤다. 그녀의 입에서 이토록 긴 문장이 흘러나오다니.


“시간에도, 인생에도, 사랑에도. 생의 모든 것에 존재하는 게 마감이야. 여튼 난 이제 마감을 할 건데, 서지호 씨는 아직 마감 준비가 안 된 거, 맞아?“


이영의 말뜻을 알아차린 지호가 입술을 뗐다.


“싸장... 나는...“


말끝을 흐리는 지호를 향해 이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 알아들은 거 같은데. 4년. 그동안에도 닫지 못했던 그 문, 지금 당장 닫을 수 있겠어?“


천천히 몸을 돌려 BAR 테이블 위를 토옥토옥 검지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이영.


“나 먼저 갈게. 마감, 잘 부탁해 지호 씨.”


또각또각, 이영이 발걸음을 돌려 가게 문앞에 선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쥐고 힘껏 당기는 그녀의 몸짓이 마치 슬로모션의 그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촤르르- 드림캐쳐의 맑은 울림 뒤로 이영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마감. 느리게 혀를 굴려 발음해보는 지호. 이영의 말이 맞다. 태선우가 없는 지난 4년, 그녀의 삶은 어딜 둘러봐도 맺음과 끊음의 구분이 없는 모호한 삶이었다. 그저 경계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시간이 갈수록 태선우라는 시절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데, 그것이 선명해지고 다가오는 게 두려운 나머지 외면하고 있는 건 지호 자신이었다.


'나는 마감 준비가 되었던가?'

'정말 태선우라는 시절을 예쁘게 흐르게만 둘 수 있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흐릿했던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기 시작했다.

여전히 태선우를 끝내지 못했던 것도. 그래서 아팠던 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어서, 또 다시 무너져내린다면 이제 두 번 다시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자신은 끊임없이 태선우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거다.

선우가 했던 말이 그러했으므로.


"서지호는 자기 감정을 끝까지 책임지기 싫으니까 버리는 선택만 하는 거잖아. 그래서 끝까지는 안 가는 거야. 버리는 게 편하니까. 죽더라도 끝을 보는 일은 괴로우니까. 서지호의 사랑은 비겁해."
"나도 너 빼고 다 버렸어. 내가 버릴 수 있는 거 전부.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 난 버릴 게 진짜 많더라. 근데 이제 태선우도 서지호랑 똑같아. 이제 내가 버릴 수 있는 건 유일하게 너 하나 뿐이거든."


사랑이 나빴다. 그보다, 서지호의 사랑은 비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늦어버렸다. 고개를 툭 떨구는 지호의 망막에 자신의 두 손이 비쳤다. 손 끝에, 선우의 온기가 옅게 감돌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지호. 남은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첫차를 나와 결연한 얼굴로 저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를 쫓기 시작한다. 천천히, 빠르게, 그러다 조급증이 난 걸음이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첫차에서 제법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걸어온 길이 불과 100m 남짓이라니. 미련이 남은 발걸음이, 어지간히 떼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자꾸 멈칫대는 두 다리를 돌려 돌아온 길로 내달리려는 것을 남아 있는 이성의 끈으로 죽을 힘을 다해 붙들었다. 그때마다 마치 자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눈꺼풀을 꾸욱 찍어내린 지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라 차마 돌리지 못한 발걸음이었다.

4년. 그래..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또 이 현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자신이, 이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지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란 어떤 깨지지 않는 믿음이 마음 한구석에 고이 접혀 있었는데. 착각이었던 거다.

그래, 너무 안일했던 거지. 픽- 자조 섞인 옅은 미소가 잠시 선우의 입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지친 듯 눈을 감고 목을 젖혀 하늘을 향해 선 선우. 하아. 깊은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뜨니 차가운 새벽 하늘에 뿌연 입김이 어렸다 소리 없이 공중에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난 4년. 선우 역시 미친 시간을 보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고,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안정적인 삶을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부모의 병원에서 나와 자신의 신분도, 배경도 지운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었다.

오롯이 지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나 이젠 무얼 위해 달려야 할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막막해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으므로.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고. 그냥 이렇게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 그 마지막은 결국 지호에게로 향하기를. 그렇게 멈췄던 발걸음을 뗄 때였다.

“꼴 보기 싫어도 보라며. 재수 없어도 피하지 말라며. 느리더라도 도망만 가지말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는 선우. 그곳에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지호가 서 있었다.


"왜..."


질문이라기엔 무색한 음성이 선우의 입 밖으로 나왔다.


"아직 안 늦은 거 맞아..? 나 그쪽으로 가도, 돼?"


순간 동공이 커지는 선우가 잠시 숨을 고른 뒤 지호 쪽으로 느리게 두 팔을 벌렸다. 와락. 단숨에 선우의 품에 안기는 지호.


“미안해. 내 사랑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


자신의 품에 깊숙이 지호를 안는 선우가 나지막이 말한다.


“하나도 안 늦었어. 이제, 시작이야.”


달빛을 머금은 벚꽃 잎이 느리게, 느리게. 새벽의 공기를 가르며 따듯하게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