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 사랑 내 곁에

- 지호와 선우의 이야기 12

by 장해주

품에 안고 있던 팔을 느슨하게 풀고 단단한 얼굴로 지호를 마주하는 선우.


"앞으로 창창한 꽃길만 있을 거란 약속, 못해."

"알아."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선 지금부터 수많은 벽을 깨부수면서 가야 할 텐데, 그때마다 다칠 거야. 주먹이 다 깨지고 무릎도 꺾이고 지금 너를 안고 있는 이 팔도, 무르게 될지 몰라."

"알아."

"근데, 이거 하나는 약속할게. 어떤 벽 앞에 서더라도, 절대 서지호 혼자 있게 안 해. 약하게 안 해. 초라하게 안 해. 서지호, 안 버려."


선우의 담담한 고백을 듣던 지호의 볼에 긴 눈물길이 내렸다.


"그러니까 지호야. 너도 나, 버리지마.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내 품으로 달려와. 지금처럼."


끄덕. 지호의 대답을 확인한 선우가 그녀의 입술에 깊게 입을 맞췄다.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예쁘게 반짝인다.

이른 아침.

선우가 자신의 차에 지호를 태운 채 함께 서울로 향하는 중이다.

차창 밖. 점점 서울과 가까워지는 풍경을 보며 지호는 그날들이 떠올랐다. 부푼 가슴으로 서울을 마주했던 날. 그리고 선우를 버리고 서울을 등졌던 날. 다시는 이 길을 마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사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갈 곳이 서울만 남을지라도 분명 자신은 이곳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선우와 지우,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말소리도 오고가지 않았다. 하지만 차 안의 공기는 그 어떤 때보다 부드럽고 따듯했다.

선우의 집앞.

손을 맞잡은 채 커다란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선우와 지호. 선우는 지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들어가자.”


선우가 지호의 손을 살짝 당기던 그때, 멈칫- 지호의 손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지난날 미현(선우엄마)과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그 벽을, 정말 깰 수 있을까... 아니, 오를 수나 있을까.‘


걱정에 앞선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주선 대문이 마치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선우가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의지로 지호의 손을 다시 한번 단단히 물려잡았다.


“무서워?”


끄덕.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작게 고개를 움직이는 지호.


“서지호, 나 봐.“


천천히 고개를 들고 선우의 눈동자에 시선을 맞추는 지호.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너 혼자 있게 안 한다고. 절대 초라하게 안 만든다고.“


지호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날, 조금 더 믿어봐. 서지호가 선택한 남자야, 나.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게 할게.”


지금만큼은, 달이 세모네모로 뜬다고 해도 선우의 말이 올곧게 믿겨졌다. 지호의 눈빛에 결연함이 스며들었다. 선우의 손을 잡은 지호의 손에 힘을 실렸다.


“응. 가자.”

집 안에서는 이미 선우의 연락을 받은 미현과 우식(선우아빠)이 소파에 앉은 채 어두운 얼굴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미현의 시선에 시린 기운이 서렸다.


“태선우. 너 결국...“


선우가 미현의 뒷말을 자르며,


“파양, 해주세요.”


“......뭐?”


미현이 놀란 얼굴로 입만 벙긋댔다. 그 뒤로 우식의 차가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미친놈! 이게 널 거둔 부모한테 최선이냐...!!”


지호가 세차게 떨리는 동공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는 굽힐 의지가 없는 듯, 맞잡은 지호의 손을 꽉 움켜쥐며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제 앞에 앉은 부모를 바라보았다.


“두 분은 제 결혼 포기 못 하시고, 저는 서지호가 없으면 안 되니, 저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키워주신 은혜, 이미 저버린 패륜아입니다. 죄송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요.“


미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너어... 정말 끝까지...!”

“저, 안 멈춥니다. 끝까지 나쁜놈 할게요.”

“어떻게 네가.. 어떻게 우리한테 이래...”


이를 악 물고 있던 미현의 입에서 마침내 “흐흐윽...” 울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선우의 눈에 슬픔이 어렸다.


“아들로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날 어머니의 품을 떠난 진짜 태선우를 대신한 자리였을지라도, 저에겐 이날까지 어머니셨습니다.“


꾸벅. 깊게 허리를 숙인 선우가 한참동안 그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편 뒤, 울고 있는 미현과 얼굴이 퍼렇게 변한 제 아버지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지호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는 선우.


철컹- 육중한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사람의 뒤로 웅장하게 울렸다.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지호의 손이 아직 선우의 손에 잡혀 있었다. 살짝 잠긴 목소리로 지호가 말했다.


“벽을 깬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어? 나는, 선우 씨한테서 가족을 뺏고 싶은 게 아니야...“

“알아...”

“그런데 어째서...”

“죄책감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어. 세상 나쁜놈이라고 손가락질 당해도, 오만가지 욕을 먹고 이기적이라고 해도.“


선우가 천천히 뒤를 돌아 나온 대문을 처연한 눈으로 마주봤다.


“이 집을 처음 온 날부터, 단 하루도 마음 편했던 적 없었어. 어머니, 아버지가 아무리 잘 대해주셔도 이 집 가족이 나 때문에 불행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죽은 태선우를 대신하는 동안, 박선우는 매일 지워져야 했으니까.“


선우가 젖은 눈으로 지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건 서지호 때문만은 아니야. 그냥 내 이기심이야.“


그런 선우를 자신의 품으로 그러안는 지호.

1년 후.

대낮부터 활짝 문을 연 첫차 안이 분주하다. 동네 몇몇 아는 이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누군가를 보고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가?", "아이구 이쁘다 이뻐어~",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해도 믿겄어!" 입담을 늘어놓는다.

첫차 안.

평소의 심야 분위기는 걷히고. 작은 테이블마다 소박한 들꽃이 꽂힌 꽃병과 은은한 조명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조명 아래 환한 미소의 지호가 하객을 맞고 있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얼굴에 어울리는 소담한 화관을 쓰고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그런 지호의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선우. 동네 이장이 그 앞을 지나다 장난스레 툭 친다.


"신랑이 아주 입이 헤벌쭉해서는~ 신부한테만 그리 홀려서! 그래가지고 식이나 제대루 치르겠능가 몰러."


이장의 놀리듯 건네는 지청구에 선우가 재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멋쩍게 넥타이를 살짝 고쳐맨다.

지잉- 선우의 자켓 안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는 선우.


[누가 뭐래도 넌 내 아들이야.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태선우로 살아.]


고맙습니다 어머니.

선우는 들리지 않는 이 마음의 소리가 미현에게 닿기를 바라며, 불어오는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웬만치 다 모인 거 같으네. 식을 거행해보자고!”


이장의 말에 모두들 좌석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하객들 뒤로 배경처럼 서 있던 이영이 직접 만든 부케를 들고 지호한테 다가가 건넨다.


“축하해. 지호 씨”


이영의 얼굴을 보자 말갛던 눈에 물기가 촉촉히 차오른다.


“고마워, 싸장...”

"잘 살아."


옅은 미소를 건네는 이영.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지호는 생각했다. 이영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구나. 옅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꼭 백합을 닮았다고.


"내가 첫차 1호가 되는 거네?"

“1호?”


눈가를 슬쩍 닦은 지호가 푸흡- 하며 말했다.


“부부 탄생 1호 (ㅋㅋㅋ)”


살짝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소리를 내는 이영.


"그러네. 이제 혼자 오면 안 받아 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여깄네."


뭔가 더 할 말을 남은 지호가 입술을 달싹이는 그때, 해사한 얼굴로 다가온 선우.


“(손 뻗으며) 가자.”


자신의 쪽으로 뻗은 선우의 손을 맞잡는 지호. 따뜻한 온기가 서로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신랑, 신부 입장혀!”


이장의 소리에 맞춰, 카세트 재생 버튼을 누르는 이영. 쇼팽의 녹턴(No2, Op.9)이 흘러나온다. 음악 소리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선우와 지호.

환한 얼굴의 두 사람 뒤로, 촤르릉- 드리캐쳐의 맑은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진다.

#. 에필로그

봄바람이 사르락 불어오는 창가. 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따라 부드럽게 펄럭인다.

그 아래로 작은 원목 책상이 놓였고. 선우와 지호의 웨딩 액자가 보인다. 그 옆으로 펼쳐져 있는 노트가 촤라락- 바람에 이끌려 넘어간다. 그러다 촥, 어떤 페이지에 멈춘다.


<지호가 선우에게>
내 사랑은. 뜨거웠고, 이로 인해 뜨겁게 아팠으며, 그 끝에 도달한 것.
그것은 어느 한 계절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니까요.
언제 피었을지 모를 새순처럼 돋았던 것이 짙은 녹음으로 푸르렀다가,
이내 그 푸르름에 나도 모를 색채가 깃들더니,
아주 시들어버릴 것처럼 휘청이다가도.
그 안에서 단단하게 익어가는 과정.
내 사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한 시즌의 계절을 지나왔을 뿐이니까요.
차가운 빛으로 떠돌던 나에게 주저없이 다가와 온기가 되어준 당신.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당신과 이 길을 걷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도착하겠죠.
이 긴 계절 끝에 놓인, 우리만의 빛깔이 입혀진 길목에.


<선우가 지호에게>
내게 사랑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서지호. 이 이름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박선우인지 태선우인지. 경계가 뭉개진 내 인생을 나조차도 알 수가 없어
그저 주어진 대로 끌려갔던 이방인과 같은 삶.
그 속에서 마침내 나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는 목적지를 찾았습니다.
길고 긴 방황의 저 길 끝에서, 서지호를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내 사랑은 약해서, 그 약함 때문에 넘어질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 일어설 수 있습니다.
비록 넘어질지라도 꺾이지는 않으니까요.
나의 연약한 사랑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또 지켜낼 겁니다.
내게 사랑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죽는 그날까지, 서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