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 남자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3

by 장해주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차희의 시선에, 은강의 눈빛이 얽혔다. 마치 안부를 묻듯 천연덕스럽게 ‘연애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온 여자. 조금 전, 자신의 꽃집에 들러 하이얀 칼라릴리를 무표정하게 들고 선 모습이 스쳤다.

순간, 은강의 눈빛이 아연하게 물들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강이 되물었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보드라운 바람 같아 꼭 그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차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한 거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차희가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 저기, 그게 말이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이유를 찾는 차희. 옆에 있는 희락에게로 시선이 닿았다. 희락은 냉큼 제 아빠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아빠! 내가 이모한테 부탁했어.”


‘이모에게 부탁했다’라는 딸의 말에, 희락을 바라보는 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밝고 해맑은 제 딸은 곧잘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주었기에. 강은 한쪽 무릎을 부드럽게 접어 딸과 시선을 맞췄다. 차희에게 무슨 부탁을 했을지 내심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딸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우리 딸이 무슨 부탁을 했을까?”


똘망한 눈으로 제 아빠의 눈동자를 보던 희락의 눈빛이 장난스레 빛났다.

“화 안 낼 거지?”


해사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은강. 그 미소에 차희의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 저 미소가 왜 이리 미치게 온 정신을 간질이는지. 언젠가부터 저 얼굴에 이끌려 몇 번이고 꽃집으로 향했었지.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꽃을 사고, 사고, 또 사고. 어느 때엔 꽃집을 갈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찾아갔던 차희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었는데. 지금의 상황을 직면하고 나니 오히려 제 감정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도 했다.

나, 이 남자한테 반한 거야?

희락이 제 아빠에게 시선을 거두며 옆에 선 차희에게로 옮겼다.

“아빠, 여기 이모 되게 되게 유명한 사람이다?”


희락을 따라 강도 차희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강의 시선이 자신에게 부딪쳐오자 차희는 깊은 갈증을 느꼈다.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 아니었다. 갈구함, 그것이었다.

차희는 이런 자신이 못내 부끄럽고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이렇다 할 어떤 접전도 없이 그저 꽃집에서 만난 남자에게 반해버린 자신이. 앞에 있는 이 남자의 마음에 헤집고 들어가고 싶다는 갈증이. 자신도 모르게 이만큼이나 마음이 커져 버렸다는 사실에. 그리고 마침내 저 해사한 웃음을 매일 마주하고 싶다는 갈구함이었다.

그녀의 이런 마음을 뒤로, 강과 희락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 이모가 어떻게 유명한데?”

“커플 만들어주는 사람! TV에도 나왔어! 맞지요, 이모?”


강과 희락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이의 물음에 엉거주춤 답을 하는 차희.


“... 어? 어, 어.. 아, 그래.”


신이 난 듯 희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모! 우리 아빠 어때요? 근사하죠? 이만하면 예쁜 여자 친구 찾아줄 수 있죠?”

아이의 천진한 모습에 애매하게 웃어보이는 차희.

둘의 모습은 마치 아주 어린 엄마가 다 큰 아들의 짝을 찾아주겠다는 듯, 영락없는 모양새였다. 이 부녀의 묘한 모습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애틋하다 못내 안타깝기도 해서. 결국 차희의 심장을 두드려 울렸다.

만약 그 상대가 내가 된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차희가 쓰게 입술을 꾹 물었다. 미쳤다. 그보다, 자신이 단단히 돌아버린 것 같다.

차희는 핸드백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명함을 강 쪽으로 건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차희의 명함을 받아 시선을 두는 강.


“요 앞 상가에서 꽃집 운영하시죠? 저 가끔 들르는데.”


명함에 박혔던 강의 눈동자가 차희를 향했다.


“네, 기억합니다. 조금 전에도 들르셨죠. 며칠 전에도 오셨고요.”


강의 눈이 차희의 앞에 놓인 하얀 칼라릴리에 꽂혔다.


“기억하시네요. 제 소개처럼, 저 꽤 능력 있는 커플 매칭 매니저에요. 정말, 생각 없으세요?”


정말 생각이 없냐는 물음이, 어쩌면 남자의 속내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의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는 생각. 차희는 이것을 숨기듯 애써 당당함으로 두르고 있었다.

강이 난처한 듯 잠시 눈썹 끝을 문질렀다.

“혹시, 우리 희락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강의 딱딱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아뇨. 오늘 이곳에서 처음 만났어요.”


차희의 대꾸에 살짝 긴장이 서렸다.


“어린아이의 말에 휘둘릴 정도로 얕은 분으로는 안 보이시는데요.”


차희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순간 부끄러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어떤 신호가 먼저 움직였다.


“아이가! 희락이가 원하잖아요.”


차희가 희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차희를 보는 강의 눈썹 끝이 꿈틀, 떨렸다.

“그건, 그쪽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차.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를 앞세우는 꼴이라니. 수치심이 밀려들어 입술을 꾹 무는 차희.

“희락아, 이제 집에 갈까?”


“아빠아...”


희락이 잔뜩 말끝을 늘이며 제 아빠의 검지손가락을 감아쥐었다. 모처럼 잡은 이 소중한 기회를 날릴 수 없다는 듯.


“이 문제는 아빠가 조금 더 생각해볼게. 아빠한테도 시간을 줘야지.”


딸을 달래는 강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희락.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막 발걸음을 뗄 때였다.


“제 명함! 버리지마세요. 생각해보시고 꼭 연락주세요. 기다릴게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차희의 소리에 강이 천천히 몸을 틀었다.


“저를, 모르시잖아요.”


차희의 눈빛이 서서히 갈구함으로 번졌다. 이제는 제가 무슨 말을 어떤 뜻으로 던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부디 한번만. 이 남자와 닿을 수 있기를.


“모르니까요! 그러니까요!! 저랑, 인연 한번 만들어보시죠.”

강의 낮게 웃음을 흘렸다.


“윤차희 매니저님. 지금 이 대화, 커플 매니저와 예비 고객으로서가,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