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나랑, 해요. 사랑.

- 은강과 희락, 그리고 차희의 이야기 4

by 장해주

커플 매니저와 예비 고객으로서가 맞냐는 강의 물음은 꽤 구체적이었다. 남자는 이미 아는 듯 물음을 던진 것이다. 들켰다. 순간 차희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차희는 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꼿꼿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 그의 눈에 자신의 눈동자를 부딪쳤다.


“커플 매니저와 예비 고객으로서가 아니라면요? 예비 고객이라면, 제 고객이 될 마음은 있는 건가요?”

강의 눈매가 깊어졌다. 또 저 눈이다. 차희는 끝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단 몇 초의 시선이 얽혔지만, 그것은 억겁과도 같은 세월을 가늠케 한다고.

그 짧은 침묵 속에 시선을 먼저 거둬들인 쪽은 강이었다. 차희 쪽에 들릴 듯 말 듯 얕은 숨을 내쉬는 강.


“나한테 관심 있습니까?”


날 것 그대로의 물음. 차희는 차게 식은 자신의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내가 올곧게 밀어붙인다면. 저 남자는 내게 온기를 나누어줄까. 그 해사한 미소처럼.


“그렇, 다면요?”


픽- 자조 섞인 강의 허탈한 실소가 첫차 안을 조용히 메웠다.

첫차에 발 들인지 이제 10분 남짓. 제 앞에 서 있는 여자는 꽤나 저돌적이었다. 감정을 숨길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다는 듯. 아니지. 이 감정이 어찌 즉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은강은 차희를 처음 만났던 그때를 떠올렸다.

첫눈이었다. 솜사탕처럼 보드라운 눈송이가 사박사박 하늘을 가르고 허공에 흩뿌려지던 그런 날. 강은 첫눈에 이끌려 꽃집 밖으로 나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제 손바닥에 차갑게 내려앉았다가 손의 온기로 미지근하게 녹아내리는 송이눈을 응시하며. 타인은 없고 오롯이 나 혼자의 세계를 마주하면서. 강은 이 시간이 지독히도 좋았고, 또 지난하게 아팠다.

이렇게 첫눈이 오던 그날, 희락의 엄마는 달랑 편지 한 장 남겨놓은 채 떠났다. 정확히는, 희락과 자신을 버렸다.


미안해. 이기적이라고, 나쁜 년이라고 욕하고 평생 원망한대도, 나..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어. 아이 우는 소리도 지긋지긋하고. 어떤 날은 네가 내 옆에서 숨 쉬는 것조차 견디기가 힘들어.
처음엔 산후우울증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냥, 그냥, 그냥.
지금 내 인생이. 여기에 처해진 내 상황이. 이 시간이 끔찍이도 싫어. 벗어나고만 싶어.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수천 번은 저 현관문을 떠밀고 나가 버리는 상상을 해.
이렇게 살다가는 나 미쳐버릴 것 같아. 아니, 꼭 죽어버릴 것만 같아.
나, 안 돌아올 거야. 난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으로는 안 와.


그랬다. 자신의 첫사랑은 이 눈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가 미지근하게 녹아버렸다. 원망은 하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딸 희락을 선물로 주었으니까. 미워하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이런 결말이 될 거라고는. 하지만 애써 외면해 온 그날은 제 시간에 맞춰 착실하게 이행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벼락 돌풍이 몰아치는, 그런 청천벽력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한 번쯤은. 자신은 아니더라도, 제가 낳은 아이는 그리워할 줄 알았다. 천륜은 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희락의 엄마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은, 이토록 잔인하게 제 핏줄을 끊어냈다. 혹여나 자신과 희락이 또다시 제 인생에 얽혀들기라도 할까 봐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토록 잔혹하게. 철저히. 두 사람과 남이 돼버렸다. 멀어져 버렸다. 그렇게, 아주 가버렸다.


바보 같은 사람. 참, 못된 사람. 그래도, 그래도. 희락이는 한 번 봐주지. 제 엄마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닮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래도, 그래도. 딱 한 번, 그리워는 해주지.

은강의 입술 끝에 씁쓸함이 맺혔다. 손바닥에 눈송이가 내려앉고 녹아내기를 상념에 잠긴 채 바라보던 강이 마침내 미지근한 물줄기를 그대로 손에 감아쥐려던 그때였다.

툭- 자신의 손바닥 위로 작고 뽀얀 손등이 얹혔다. 눈을 들고 보니 웬 여자가 서 있었다. 강은 순간 자신이 어딘가의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한 지 몇 초가 흘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강이 여자에게 시선의 밀어를 던졌다.


“그냥, 잡아주고 싶어서요.”

눈송이처럼 보드랍고 담백한 음성이 강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있고 싶을 만큼. 눈송이가 녹아내릴 때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 같은.

그러다 이내 강의 동공에 서서히 초점이 제대로 맺히기 시작했다. 불쑥 끼어든 다른 세계가 깨졌다. 강의 눈에,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미친 여자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깜짝 몰카라도 찍고 있는 건가. 갑자기 나타나 남의 손을 그냥 잡아주고 싶다니.


“계속 잡고 있을 겁니까?”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세 제 손을 거둬들였다.

“가끔은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온기가 위로되기도 하니까요.”

뭘 알고 하는 소린지. 강은 여자의 눈에 깊이 자신의 눈을 맞췄다.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시선의 저편. 여자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이유를 찾은 듯 말문을 열었다.


“꽃, 사러 왔는데요.”


꽃을 사러 온 이상한 여자.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에게 온기가 되겠다며 날아든 여자. 차가운 눈송이처럼 다가와 미지근하게 녹아내릴 것 같지 않은 여자.


차희는 강의 꽃집에 들어서 찬찬히 내부를 훑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늑한 공간. 온갖 꽃들이 제 색과 향을 내느라 마치 바깥 세계와는 다른 공간 듯했다.

“어떤 꽃이 필요하시죠?”


강이 물었다. 그 물음에 답을 하듯 차희가 원하는 꽃을 능숙하게 골라냈다.


“핑크 리시안셔스, 라벤더 스톡, 그리고, 음.. 고민되네. 더스티밀러로 할까, 유칼립투스로 할까..”

순간 차희를 경계하던 강의 표정이 슬쩍 풀어졌다. 조금 전, 이상한 세계로 자신을 끌고들어간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있었으니까.


“꽃을 잘 아시네요.”


“아, 제가 얘네랑 좀 친한 직업이라서요. (옅은 미소)”

“용도를 알려주시면 추천드릴게요.”


“아, 칭찬용? 아, 아니다. 선물이라고 할게요.”

아리송한 그녀의 대답에 강은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그녀 자신이 고른 꽃과 닮아 보였으니까.

“선물이라면, 더스티밀러를 추천합니다. 모던하기도 하고. (유리문 밖으로 시선 던진다) 오늘 같은 날에 꼭 어울리는 꽃이죠. 따뜻하니까요.”


꽃 설명을 마치고 또다시 해사하게 웃어 보이는 강.

그 후로 차희는 꾸준히 꽃을 사러 자신의 꽃집에 들렀다. 오는 날은 대중없었다. 연일 3일 내내 오는 날도 있었고, 보름 가까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차희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그날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첫눈에 홀린 날. 첫눈은 멀쩡했던 사람도 살짝 미치게 하는 마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또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야 말았다. 오늘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 내뱉은 여자의 문장이 또 그랬다.

“매니저, 고객 이런 애매모호한 거 말고. 제대로 통성명해요, 우리. 윤차희에요.”


강은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통성명이 어려운가요?”


강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차희의 눈을 응시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서 기를 쓰고 또 모르고 싶다. 알고 나면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알아서, 어쩌자는 말인가.

강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차희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은강 씨. 나 당신 이름 알아요. 꽃집에 수없이 갔고, 그때마다 꽂혀 있는 명함 한 장씩 꼭 들고 나왔으니까. 통성명 말고 다른 거 하죠.”

다른 거라니.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 여자. 이제 정말 끊어내야만 한다.

“저기ㅇ...”


하지만 차희가 강의 말을 단번에 자르며 훅 밀고 들어온다.


“나랑, 해요.”


“뭘 말인가요.”


“할 수 있는 거, 전부. 인연, 연애, 사랑, 뭐 이런 거.”

강은 이제 제 이마를 한 손으로 턱 잡고 이 기막힌 상황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제어하고 있었다. 제 인생을 통틀어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여자의 이상한 언행에 자꾸만 맞장구를 놓고 있는 형국이라니. 평소의 자신이라면 이런 상황을 가볍게 무시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여자도,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은강 역시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쯤은 벌써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꼭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감겨 있는 것만 같았다.

“미쳤군.”


평소의 그것처럼, 이미 평정을 되찾은 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희는 이제 두렵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간에 결정이 나기 전까지가 괴롭고 어렵고 힘든 거다. 이미 제 감정 따윈 까발려져 버렸다. 그래서 오리발을 내밀기엔, 늦었다.


“세상엔 미쳐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그때였다. 제 아빠와 이모의 대화를 들으며 번갈아 쳐다보던 희락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 그럼 이모가 우리 엄마 되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대였죠 나에게 다가올 한 사람

단 한 번의 스침에도 내 눈빛이 말을 하죠


바람처럼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길 바래요

바보처럼 먼저 말하지 못했죠, 할 수가 없었죠


You Are My Everything

별처럼 쏟아지는 운명에

그대라는 사람을 만나고

멈춰버린 내 가슴속에 단 하나의 사랑

You Are My Everything

- 거미 <You Are My Every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