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 방송쟁이들
자정이 넘은 시각.
잠도 안 오고 심심하기도 하고, 어쩐지 무료하기까지 해서 연신 티비 채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볼 때였다. 멍한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 한 줄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껏 방송을 만들며 누군가에게 방송을 만들어줘서 고맙단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
............ .
없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은. (물론 누군가에게 고맙단 말을 듣기 위해 방송을 해 온 것은 아니다)
나는 12년 차 프리랜서 방송 작가다.
그간 교양, 예능, 보도국 등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들을 거쳐왔다.
이 많은 방송 프로그램들을 하며 사실 즐겁기만 하고 뜨겁기만 했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다신 방송국 쪽으로 침도 뱉지 않을 거라고 호언하며 뒤돌아 걷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없는 씽크 하나 때문에 울고불고 짜며 밤새 전전긍긍 하기도 했고 피디와 의견 충돌로 마음 상한 적도 많다.
섭외를 할 때면 출연자들에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죄송할 게 많고 사정할 게 많은지 연신 굽신굽신, 읍소 해야 할 때는 또 얼마나 많았었나.
이런 무수한 상처와 비참한 기분을 참아내며 방송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음... 사실 딱 찝어 이래서 나는 방송을 합니다! 라는 답은 안 나온다.
요즘 어떤 관찰 예능 중에는 연예인과 그들의 짝꿍인 매니저가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다. 언젠가 이
프로그램에서 매니저들의 숨은 표정들이 방송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담당하는 연예인이
잘 될 때,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주고 행복해하는 진솔한 얼굴들.
내게 방송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조금 추상적일 수도 있지만 내가 방송을 놓지 못하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기분이라고, 이런 마음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죽자고 만들어낸 방송이 전파를 통해 무사히 흘러나갈 때의 짜릿함. 그리고 사고 없이 무사무탈히 내 새끼 같은 방송이 전 국민에게 보여진다는 희열.
묘하게 이런 기분과 마음에 점점 중독이 되어간다.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우리가 문득 사회생활을 한 지가 10여년이 넘어갔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친구는 일반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10년의 회사생활에도 자신이 겨우 대리라는 직책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토록 회사에 충성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과 적금통장만이 10여년의 그 세월들을 증거해주고 있다고 말이다.
한참을 친구의 말을 들어줄 때였다. (사실 회사원 친구의 상황과 마음을 100프로 다 이해하기는 힘들어 그 답답한 마음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때론 누군가 나의 우울한 상황을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으니까)
잠시 숨을 고르며 커피 한모금을 마신 친구의 말에 나는 발끈, 하고 속에서부터 깊은 열을 내뿜게 됐다.
"아, 너는 프리랜서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이런 내 얘기 좀 그렇..지? 근데 너, 벌이는 좀 되는 거야? 사실 프리랜서가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못 벌 땐 엄청 쪼들리고 생활도 제대로 안 되고 그러지 않아?"
하하핫. 이 친구 보게. 이게 대체 무슨 고릿짝적 올드한 발상인가. 아직도 프리랜서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하필 그게 또 내 친구라니.
나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커피 한모금을 마신 후 이렇게 대꾸했다.
"너 같이 백날 따박따박 월급 받는 나인투식스 월급쟁이들은 절대 프리랜서 못해. 왜냐,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생활이 익숙한 사람들은 진짜 야생에서 생활 할 수 있는 힘이 없거든. 근데 나 같은 프리랜서는 진짜 야생인들이야. 당장 실력이 없으면 굶어 죽어. 야, 너 프리랜서는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친구는 이렇게 말하는 나를 제법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눈을 몇 번인가 꿈뻑대더니 민망한 듯, 멋쩍은 듯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프리랜서라는 게 시간이 자유롭고 일만 잘하면 누군가의 눈치 볼 일도 크게 없고, 또 내가 하는 만큼 버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의 대가는 참 혹독한 것이다.
프리랜서는 조직에 있는 사람보다 더 치열하다. 회사는 조직이라는 울타리가 있지만 프리랜서는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그렇기에 더 치열하고 예민할 수밖에 없다. 뿐만인가. 내 실력이 더 뛰어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뺏긴다. 몸을 더 혹사 시키지 않으면 벌이가 줄어든다. 더 좋은 아웃풋을 얻기 위해서는 주말, 공휴일, 명절은 물론 출퇴근도 따로 없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세상에 있는 직업들 중 단명하는 직업 워스트 10에 5위가 방송작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 후배 중 하나는 현재 종편 채널의 예능 프로그램 피디다. 일주일이면 사나흘은 집에 못 가고 선배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치열하게 그 바닥에서 뒹구른지 꼭 4년이 지난 후에야 입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꽤 굵직한 프로그램에서 일하고 있는 7년 차 피디다.
후배는 여전히 막내 때와 같이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끼니를 거르며 밤샘을 하기 일쑤다.
후배가 입봉하기 전, 조연출 생활로 한참 힘들 때 푸념 섞인 소리를 많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는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배에게 물었었다. 그만 방송을 내려놓고 싶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때 후배가 한 말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에이, 언니 그래도 만들어야죠~ 방송"
멍하니 TV 채널을 돌리던 그 시각. 나는 후배의 이 한 마디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송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정말 잘 보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누군가는 박봉이니 그만둬라, 허울만 좋은 3D직업이다, 더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해라, 수명 줄어든다.
온통 그만둬라, 때려쳐라, 관둬라, 관둬라 이야기. 세상에 자신들이 보는 방송을 만들어줘서 잘 보고 있다는 말은 정작 하지 않는다.
사실은 나 같은 방송쟁이들에게는 그말이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데 말이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전부가 그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그만둔다면 세상에 방송 만들 사람은 대체 누굴까.
지금도 방송 한 편을 위해
이 시간에도 잠 못자고,
밥 못먹고 씻지도 못하고 있을 작가와 피디,
방송쟁이들에게-
한여름 땡볕에도 온종일 카메라를 들고
한컷한컷을 자신의 땀방울과 바꾼 당신,
밤새도록 카페인으로 졸린 눈을 달래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으로
대본을 써내려가는 당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날이 좋아도, 꽃이 피는
계절에도.
그 모든 순간들을 느끼고 맞을 새도 없이
방송을 만들어가는 그대들에게,
당신,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힘을 냅니다.
나는 오늘도 당신들이 만들어낸 방송에
눈물 겹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당신들이 있어 정말 좋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