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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해주 Jun 24. 2019

작가가 무슨 봉이야?

"야! 나 진짜 못 해먹겠다!! 아 진짜 너무 짜증나!"


휴대폰 속 친구의 목소리가 몹시 격앙돼 있었다. (사실 이런 전화는 비단 친구 작가뿐 아니라 숱하게 받는 고로, 크게 놀라지 않는다) 나는 덤덤하게 물었다.


"왜. 피디가 속 썩여?"


"이 xx, 진짜 미친x 아니야? 완전 또라이 같애. (욕을 퍼붓는 친구의 목소리는 거의 울기 직전이다)"


나는 차분하게 다시 되물었다.


"뭐가 문젠데. 말을 해야 알지."


친구는 기다렸단 듯 속사포처럼 랩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출연자 분들이 섭외가 되어 기뻤던 이야기, 그런데 그런 출연자 분들을 화나게 한 피디 이야기, 촬영본을 확인했는데 인터뷰고 그림이고 뭣하나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라 기함을 토했던 이야기, 그런 피디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웠던 이야기, 피디와 말이 안 통해 이 모든 상황을 팀장과 공유했건만 그런 피디만 감싸도는 통에 속이 뒤집어지고 타들어가는 이야기.


"화악! 다 지르고 나 나갈래!! 야!! 막말로 작가가 무슨 봉이야?!"


친구는 정말 분통이 터져 죽겠다는 듯 말했다. '작가가 무슨 봉이냐'고.

누군가는 방송작가라는 직업에 막연하고 대단한 환상을 품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방송작가라고 하니 여의도나 상암에 있는 방송사의 돈이라는 돈은 죄다 쓸어담는 줄 알고, 또 어떤 이들은 세상 고고하고 고상한 직업으로 여기기도 하고. 그러나 이건 정말 뭘 몰라도 단단히 몰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방송작가는 대단히 환상을 품을 만하지도 않고, 방송사 돈을 쓸어 담지도 않으며 고고하고 고상하지도 않다.

방송작가는 여전히 박봉의 3D직업이다. 피디와 소리를 지르며 싸울 때도 있고, 열 받는 상황에선 쌍소리도 곧잘 한다.


작가라고 하면 으레 책상머리에 앉아 우아하게 폼을 잡고 글 쓰는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겠지만 그건 정말 환상이다. 몇 날 며칠 밤새우며 떡진 머리로 집에 못 갈 때도 많고, 주말도 없고 명절도 없고, 낮도 없고 밤도 없고. 아침부터 밤까지 밤낮없이 전화통을 붙들고 사는 일상이 대부분이다. (특히 막내 연차 때 더 그렇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어린 연차일 때보다는 덜하다)

촬영할 장소와 출연자 섭외, 촬영 현장 세팅, 취재, 답사, 촬영구성안, 편집구성안, 내레이션 대본, 스튜디오물이면 스튜디오 대본, 출연자 의전, 출연자 스케줄 체크, 촬영본 프리뷰, 편집 파인, 때에 따라 자막 작업. 등등 하는 일이 무수히도 많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작가 혼자만 하지는 않는다. (작가도 그렇지만 피디도 옆에서 보면 참 딱할 때가 많다) 프로그램 특성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고, 현재 몇 년 차 작가이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이런 작업을 거치고 거치고 또 거쳐서 시청할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치이고 쓸리고 하면서 대체 왜 방송을 못 놓는지 가끔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 직업을 말하지 않게 됐다. 일적으로 정말 기필코 만나야 할 상대에게 내 신분을 드러내야 하지 않는 이상 내가 작가라는 걸 굳이 밝히지 않게 됐다. 어쩌다 편한 사석에서 만난 누군가가 내게 직업을 물어오면 대게는,


"백수에요."

"그냥, 회사 다녀요."

"이거저거 하는 프리랜서에요."


내가 이렇게 대응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방송을 시작하고 꿈에 부풀어 방송생활을 하던 몇 년 간은 내가 방송작가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뿌듯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 동네방네 떠들기도 하고. 내가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 작가인지, 거기에서 맡는 코너가 뭔지 이야기 하는 걸 즐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도돌이로 돌아오는 질문 세례에 기가 질리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나는 방송작가입니다."


이 한 마디에 따라서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알만 한 프로그램 뭐 한 거 있어요?"

"연예인 많이 보겠네요~"

"연예인 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예쁘고 잘생겼어요?"

"며칠 전에 ~~내용의 방송을 봤는데, 그거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죠?"


방송작가에 담긴 의미보다, 실제로 본인들이 보는 방송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보다, 더 궁금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방송 자체가 굴러가는 스토리는 사실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씁쓸하고 또 가끔은 화가 치밀 때도 있고 이따금씩은 방송에 회의감마저 들 때도 있는 이런 기분. 이런 마음.


사실 알아주길 바래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들의 말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직면할 때, 그리고 이런 말들을 들을 때 내 마음 한켠에 드는 어떤 한 단어 때문이다.


고.작.방.송.


방송 한 편을 위해 쏟아부었던 내 모든 시간과 열정과 그 이상의 어떤 치열함들이 '고작 방송'이 되어버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친구 작가가 씩씩대며 열을 올리는 순간에, 개떡 같은 그림에 찰떡 같이 기어코 원고를 쓰겠노라 다짐하는 악바리 근성에, 나는 박수를 보낸다. 그마저도 없다면 이 치열하고 살벌한 방송 바닥 생활을 어찌 견딜까.


한참을 울분을 토해내는 친구를 토닥토닥. 그새 친구의 감정도 좀 가라앉았는지 연거푸 너가 이야길 들어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고맙다고 마음을 전해왔다.

이 험난하고 팍팍하고 가파르고 삭막한 방송생활에 위로는 어쩌면 가끔 바쁜 내 시간을 내어주며 들어줄 때 느끼는 따뜻함이 아닐는지.

같은 신분에서 도닥여주고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모든 순간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그들이 있고.


혹시 주변에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쯤은 이렇게 말을 건네봐도 좋겠다.


"오늘도 방송 만드느라 참 고생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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