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소리 좀 질러도 돼요?"
옆에 있는 디자이너 언니에게 물어본 후 선배 언니는 3층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나 빡쳐 죽을 거 같아.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 거야?"
같이 프로그램을 하는 선배 언니는 병행하고 있는 다른 프로그램을 하며 정말 말그대로 "빡쳐" 죽을 것만 같다고 했다.
두 선배 언니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최악.
최악의 상황엔 언제나 피디와 작가의 의견 충돌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서로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 서로에게 바라는 게 하나씩 늘어갈 때, 상대의 의견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때.
사실 피디와 작가는 견해나 생각하는 면이 다를 때가 많다. 방송을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 또 피디와 작가의 롤을 나누어야 할 때도 그렇다. 이건 피디가 해야할 몫, 이건 작가가 해야할 몫. 피디가 해도 되고 작가가 해도 될 애매모호한 롤이 주어졌을 땐 최대한 서로에게 미루려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상 우린 서로가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지금 있는 일도 너무나 많아서 좀 덜었음, 하는 판국에 무언가 또 일을 떠맡아 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선배 언니들의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또 그 상황들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참 답답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 한 줄이 들었다. 피디와 작가.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사실 뭇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매일 그렇게 프로그램 하면서 지지고 볶고 붙어사는데 정분나겠다고.
하하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붙어 있는' 상황만을 생각했을 때 그렇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박애주의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피디와 작가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까지 가는 커플은 사실 많지 않다)
내가 7년 차쯤, 아침 생방송을 할 때였다. 나랑 짝꿍 피디는 한 살 어린 6년 차 피디였는데 그 피디와 일 할 때가 내겐 최악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붙여 놓은 가편집은 무슨 내용을 담고 싶은지, 도대체 이 영상으로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나는 본사 시사 시간을 미루고 5분짜리 영상을 타임 제로부터 한 컷, 한 컷 고르며 9시간을 붙인 끝에야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피디의 문제라고만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내 주변 피디들 중에는 작가 때문에 고생한 피디도 꽤
많다)
참 아이러니한 건 정말 죽일 듯이 악에 받쳐 일을 했다가도 방송만 끝나면 정말 언제나 그랬냐는 듯 그 관계가 회복되기도 한다.
피디와 작가, 우리의 관계는 참 쉽지않고 녹록치가 않고 깊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하지만 일단 한 번 관계가 딱 터지기 시작하면 세상 이보다 좋은 친구도 없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찌든 방송생활의 한탄도 서로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단 한 마디,
한 언어로만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실 나는 방송을 하며 피디와 엄청나게 언성을 높여 싸운 적은 손에 꼽는다. (무슨 인복인지 정말 좋은 피디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10여년이 다 된 지금까지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방송만으로도 너무나 힘든 우리. 콘텐츠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우리. 서로의 시름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줄 수 있는 우리. 힘들 땐 서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며 위로할 수 있는
우리. 수고하고 짐 진 것 같이 무거운 마음일 때 말없이 같이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시간으로 툭툭 털어낼 수 있는 우리.
이런 따뜻함이 더 공존하는 우리가 되길, 이렇게 따뜻한 만남으로 이어진 우리가 만들고 그려내는 방송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묻어나길, 서로에게 상한 마음을 전하기보다 조금 부족해도 조금 실수해도 지금까지 만든 과정을 읽어주고 수고했다고 말 할 수 있기를.
모든 방송이 피디와 작가의 작품이 아닌, 우리의 작품이 되길 바라며,
"우리의 모든 이야기엔 당신의 수고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방송엔 당신의 열정이 있습니다. 마음 상할 때가 더 많은 방송바닥이지만 오늘만큼은 우리, 서로 위로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