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사 안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문득 이런 진부한 생각 한 줄이 떠올랐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을까. 나는.'
내 사랑은 이번에도 산산이 흩어져 공중분해 돼 버렸다. 결혼을 약속하고 미래의 단란한 가정을 꿈꾸던 시간도, 사랑을 속삭이며 귓가를 간지르던 시간도, 서로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도.
바람에 나부껴 사라졌는지, 비 오던 그날에 다 씻겨 갔는지, 펑펑 내리던 그 하이얀 눈에 섞여 있다 녹아 없어졌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그 시간들이 조금씩 조금씩 그 모양을 잃어가기 시작했는지조차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도 없고 나도 없어져버린 그 시간들. 분명 존재했던 그 어딘가에 이제는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난 적은 있는지, 혹은 그 사람이 나를 만난 적은 있는지도 헷갈릴 만큼, 먼 기억의 그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사람과의 연애는 짜고 습했다. 달콤해서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초콜릿이나 한 여름의 얼음조각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처음과 달리 어느 지점부터 우린 늘 치열했고, 힘들었고, 서로의 마음에 기생해서 그 나약하고 여린 감정의 조각들을 좀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하고, 포장을 하고, 포장을 하고. 속에 것은 별 거 없는데 상자만 거대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우린 그렇게 5년을 만났다.
나는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결혼이라는 꿈을 꾸게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실제로 많은 부딪힘과 부대낌이 있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내게 다가왔던 그 마음 하나.
힘들고 외로운 어떤 날엔 말하지 않아도 가만히 안아주었고, 어떤 날은 도시락을 직접 싸들고 와서 나를 웃게 해주었고, 사람 많은 곳에서도 나를 사랑하는 감정 표현을 스스럼 없이 했던 사람. 펑펑 울던 어느 날엔 나를 끌어안고 함께 울어주던 사람. 같이 손잡고 길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었던 사람.
외모가 특별히 잘나지도,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우린 그 어떤 연인보다 특별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특별했던 연인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갔고 우린 아무것도 아닌 관계처럼, 메마른 풀꽃마냥 시들어갔다.
서로가 있기에 행복했던 시간은 서로가 있기에 힘겨운 시간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네가 있기에 행복해, 라는 말은 순식간에 너 때문에 힘들어 미치겠다는 말로, 어디 가서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말라는 표현은 제발 남들 앞에서 그런 표현 좀 하지 말라는 걸로. 저 사람이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던 시간들은 제발 저 사람이 그만 내 인생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바람이 어디서에부터 불어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이 관계도 언제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마른 풀꽃이 더 바싹 말라 뿌리까지 뽑히기 전에, 우리는 관계를 더 지속하지 않기로 했다. 서로 시간을 갉아먹고 좀먹지 말자고 하던 날, 나는 우리가 언제나 사랑을 속삭이던 그 자리에서 해묵은 감정을 다 폭발시켜버렸다. 네가 나쁜 거라고. 네가 잘못하는 거라고. 나에게 화가 난 건지, 그에게 화가 난 건지 그건 모를 일이었다. 그저 이 지난한 관계에 무언가 남은 끈끈함이라도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저,
"나 먼저 일어날게.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의 사랑이 깨지고, 결혼에 대한 꿈이 산산조각이 난 어느날부터 주변 사람들은 나를 위로했다. 남녀 간에 만나다 헤어질 수도 있다고, 큰일날 뻔 했다고 잘했다고, 이혼해서 돌싱이 되느니 차라리 지금 이렇게 된 게 백 배 천 배는 잘 된 일이라고, 다음 번에는 조금 더 신중하면 될 일이라고.
내겐 그저 사랑일 뿐이었다. 그 사랑이 비록 완성되지 못했어도, 그리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겐 사랑이었다. 그뿐이었다. 이걸 두고 이 모든 '현실적인 위로'를 논하기엔 내 사랑이 너무나 가치가 없어지고 슬퍼지는 일이었다.
"괜찮아, 그저 사랑일 뿐이었는 걸."
하고 잔잔한 위로가 누군가로부터 전해졌다면, 그때의 나는 조금은 덜 상처 받고 조금은 그 상처에 대한 마음을 덜어내는 시간이 가뿐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정말 괜찮다.
그게 설사 아픔의 모든 지난한 여정이었더라도.
그 모든 순간은 어느 순간 별처럼 반짝이고
달처럼 고요할 것이며
해처럼 밝게 빛날 것이다.
나의 모든 아픔과 시련의 상처들까지도, 그리고 사랑한 그 모든 순간들까지도.
괜찮다. 그냥 사랑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도, 이별을 한 사람에게도.
"괜찮아 그냥 사랑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