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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제 Sep 22. 2020

사람들이 기념일을 왜 챙기는지 알 것도 같네요

부부의 첫 기념일

ㅡ어? 내일이면 우리 결혼한 지 백일이지만 기념일을 챙길 필욘 없어~


휴대폰 속 디데이 카운트를 들여다보며 아내가 말했고, 남편은 어이없단 듯 웃으며 대꾸했다. 뭐해?


ㅡ아니~ 우리 내일 결혼한 지 백일인데 우리는 원래 기념일 안 챙기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아내는 남편이 기념일을 챙겼으면 바라고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무심결에 핸드폰 화면을 넘겨보기 전까진 아내도 내일이 결혼 백일 차인지 모르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심심한 일요일, 많이 실없는 편인 아내는 괜히 가만히 있는 남편에게 장난이 걸고 싶었던 거다.


  남편과 아내는 딱히 백일이니 이백일이니 하는 기념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연애 때도 생일을 제외하곤 특정 날짜를 기념해 본 일이 없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 데이처럼 장사치들의 계략으로 탄생된 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 프러포즈도 않고 결혼을 했다. 무슨 정략 결혼 따위를 했다는 게 아니라, 여기서 ‘프러포즈’는 으레 ‘프러포즈’란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런’ 프러포즈를 의미한다. 앞으로 나올 ‘프러포즈’도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데이트를 하다 보면 헤어지기가 아쉬워 얼른 결혼을 해 함께 살고 싶었고, 그렇게 스멀스멀 나온 결혼 이야기가 어느새 실제 결혼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결혼을 하기로 두 사람 모두 마음이 맞은 마당에 형식적으로 하는 행사로서의 프러포즈는 뭔가 이상하고 멋없는 것 같아 둘 다 생각이 없었다.


  각각 비슷한 생각을 하곤 있었지만 아내는 남편이 프러포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묻지 않는 게 섭섭했다. ‘프러포즈는 안 해도 돼!! 그렇지만 내가 프러포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궁금해해야 하는 거 아냐? 난 정말 프러포즈 안 받고 싶은데!!! 오빠가 내 의견도 궁금해하지 않고 안 하는 건 기분 나빠!!!’라며 은근히 합리적인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프러포즈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지만 은근히 사회적으로 당연시 되는 ‘어떠한 형태’의 프러포즈를 아내도 무의식적으로나마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니 남편은 아내가 프러포즈를 원하는 건지 아닌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남편에게 아내는 ‘내가 이 말 했다고 프러포즈 하기만 해!!! 그럼 진짜 화낸다!!!!!’라며 엄포를 놓았고, 아내 말 잘 듣는 남편은 결국 ‘프러포즈’를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결혼한 지 백일 째 되는 저녁, 아내보다 퇴근이 늦은 남편이 요란스런 케이크 인형이 달린 머리띠를 쓴 채 파리바게트에서 파는 조그만 치즈케이크를 양손에 들고 들어왔다. 케이크에는 불이 붙은 초들이 꽂혀있었다. 숫자 1 모양의 초 하나와 하트 모양의 초 두 개. 백일 케이크였다.


  아내는 깜짝 놀랐다. 실은 아내도 퇴근길에 치즈케이크를 사 와 냉장고에 몰래 보관 중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결혼한 지 백 일 째 되는 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을 게 뻔하니 아내 스스로라도 작게나마 자축하는 의미로 준비해보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이 준비한 것과 같은 치즈케이크를 사 오니 놀랄 수밖에. 아내는 놀란 맘을 숨기고 남편이 들고 있는 케이크의 초를 껐다.


  남편이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아내는 뒷베란다에 준비한 것들을 세팅했다. 준비한 거래야 봤자 퇴근 길에 GS편의점에 들러 사 온 조그만 치즈케이크와 마카롱이 전부였다. 아내는 냉장고 넣어둔 치즈케이크와 마카롱을 꺼내 뒷 베란다로 옮겼다. 그리곤 부부가 애용하는 와인 잔과 맥주 한 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꽃병까지 옮겨 그럴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블루투스 스피커에 휴대폰을 연결해 음악도 틀었다.


 

샤워를 마치고 뒷베란다가 있는 작은 방에 들어온 남편은 처음엔 아내가 초를 꽂아놓은 케이크가 자신이 사 온 것인 줄로 착각했다. 그저 분위기를 내려 다시 초를 꽂아놓았다고만 생각한 거다. 그러나 이내 아내도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 치즈케이크를 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은 치즈케이크, 마카롱, 맥주밖에 없는 소소한 백일이었지만 행복하기엔 충분했다.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카진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뒷베란다에 있었다.


  백일이라고 대단히 로맨틱한 말들이 오간 건 아니다. 남편은 회사에서 사장과 동업자 사이에 끼어 힘들었던 일을 토로했고, 귀촌을 생각 중인 친구가 설명해준 자연농법, 유기농법 따위의 얘길 늘어놨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좀처럼 말이 없는 남편이 학교에 다녀온 초등학생 마냥 종알종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게 아내는 기분이 좋았다. 부부가 처음 챙긴 기념일은 더할 나위 없었고, 이런 기념일이라면 앞으로 종종 챙겨볼 법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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