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
토요일이라고 마음 놓고 집에서 커피를 두 잔이나 내려마신 탓에 열두 시가 넘도록 잠이 안 온다.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서 노느라고 고생이 많으셨던지 머리를 대자마자 안 골던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아내는 함께 잠들어 보려 애써 눈을 감고 누워보았지만 잠이 올 조금의 기미도 보이질 않아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거실 책장에서 이 책, 저 책 뽑아 들고 간을 보기 시작했다(남편의 취미가 책을 사모으는 것이라 부부의 집에는 거의 새책에 다름없는 책들이 아주 많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어 슬쩍 뒤적이다가는 '짜파게티 먹고 싶다'라는 생각만 하고 덮어 넣었다. 그러다 발견한 촌스러운 표지의 책 한 권. 제목도 촌스러운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이다. 표지도 촌스럽고 제목도 촌스러운데 이 책을 골라 든 이유는 이 책 속지 여기저기에 남편이 자필로 남겨둔 메모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남편의 원래 직업은 사진작가이다. 브런치 연재 컨셉을 잡기 위해 남편의 부캐(부캐릭터의 준말)를 사진 찍는 사람으로 소개하긴 했지만, 작년 말 공연회사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남편은 본캐(본캐릭터의 준말)로 사진을 찍어왔다(그렇지만 현재는 공연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부캐로 사진을 찍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 집에는 사진과 관련된 책이 매우 많다.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도 그중 하나이다. 표지엔 '한국 대표 사진작가 29인과 여행하는 시인이 전하는 바다와 사람 이야기'라는 소개를 달고 있다. 소개 그대로 29명의 사진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바다를 찍고, 여기에 각각 짧은 글들이 엮여 편집된 구성이었다.
언제 적은 메모들인진 모르겠지만 지금과 다를 것 없는 남편의 필체가 반갑게 느껴졌다. 남편은 거의 모든 사진작가의 사진마다 사진에 대한 감상이나 본인의 생각을 메모해놓았다. 꽤 열심히 책을 읽은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다가 부른다고 언제든 바다로 달려갈 수 있는 삶이 몇이나 될까'라는 글에는 밑줄을 그어놨고, '기억의 바다'라는 단어에는 동그라미를 두 번이나 쳐 놓았다. 사진의 색감이나 노출에 대해 말하거나 '사진의 기법이 궁금하다'라고 적어놓은 걸 보면서는 남편이 사진을 전공했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한 시가 다 되어가는 새벽, 혼자 거실에서 남편의 독서의 흔적과 메모를 더듬자니 괜히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 읽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짜릿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모는 이 것이다.
*김중만씨의 사진...
하늘과 땅 사이의 얇은 바다.. 그 사이에 바다들이 우리의 삶과 겹쳐진다. 우리의 삶에서의 짧은 만남들... 하지만 많은 시간보다 우리 기억에 깊게 뿌리내리는 것들이 있다. 마치 사진 속에 많은 부분이 땅과 하늘을 차지하지만 내 눈에는 바다밖에 기억에 안 남는 것처럼...
아마도 이 사진을 보고 쓴 메모인 것 같다.
사진을 보면 하늘과 땅이 거의 모든 면적을 차지한다. 바다는 얇은 띠처럼 보일 뿐이다. 남편은 그 '얇은 띠'같은 바다를 보며 짧지만 기억에 깊게 뿌리내린 만남들을 연상했나 보다. 얇지만(짧지만) 깊게 뿌리내리는 것들이 있다. 사진 대부분이 하늘과 땅으로 구성되어 있어도 이 사진이 '바다' 사진으로 기억되는 이유이다. 남편이 유독 바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남편의 글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다 보니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P.S. 남편, 말 안 하고 마음대로 올려서 미안. 자고 있어서 허락을 맡을 수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