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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Jun 01. 2021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MZ 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17 – 내가 지칠 때

남자 친구에게 자세한 사정 설명 없이 그냥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해서 속을 태우던 녀석에게 내 연애 시절 얘기까지 해 주고 두어 주 지났을까, 딸이 긴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빠, 나 요즘 너무 힘들어. 회사 일도 그렇고. 그러다 보니 오빠를 만나도 전처럼 편하지 않고, 온갖 생각을 하고 짜증만 더 내게 돼. 오빠가 날 안심시키려고 무슨 말을 해도 그냥 짜증만 나. 그리고 더 미안하고... 그게 자꾸 악순환돼. 

내가 왜 자꾸 감정에 휘둘리고 오빠를 못되게 구는지 모르겠어. 오빠가 나를 진심으로 많이 좋아하는 건 알아. 하지만 언젠가는 달라져서 실망할 수 있으니 기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자꾸 거리를 두려고 하게 돼. 실망스럽거나 서운하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려고. 난 왜 그럴까. 그게 내 마음은 아닌데... 내가 잘못하는 것 같아서 더 불안하고 예민해지고 나 자신이 더 싫어져.     


지난번 조언이 도움이 안 되었을까. 회사에서 감당해야 할 짐이 가볍지 않고 지쳐서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구나. 이러다가 아끼는 사람을 잃어 아프게 되지는 않을 걱정되고 움츠려지고 있구나. 비는 점점 더 내리는데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 못한 채 서 있는 소녀를 보는 듯했다. 문득 노래 한 곡이 생각났다.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게는 우산보다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것임을

        울고 있는 사람에게는 손수건 한 장보다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이 필요한 것임을     

                                    - 이정하 시, 김현성 노래, "기대어 울 수 있는 한 가슴" 중에서


조금 허스키한 가수의 이 노래를 만난 것은 십수 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그동안 쌓은 실력을 마음껏 휘두르리라며 호기롭게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쯤 될 무렵이었다. 거처도 서울로 옮겨 주말부부 생활을 할 만큼 일에 매달렸으나 한해 지나니 그간의 인사치레 안면 빨은 거의 바닥났고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때맞춰 닥친 경제위기는 모든 계획을 무산시켰고 진행되던 것마저 멈추어 세웠다. 망연자실, 도움 청할 누구도 떠오르지 않아 피하는 듯 어느 소극장에 앉아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날 성수동 시장 골목 순대 곱창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빗소리에 섞여 시작되는 이 노래를 아마 수십 번도 더 돌려 들었던 것 같다.   

  

무거운 숙취를 안은 채 사무실에 나와 널브러진 책상을 치우고 일을 하려 했으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며칠 동안 가는 대로 운전했다. 신기하게도 잠시 눈을 떼면 큰일 날 것 같던 일들이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갔다. 집에도 안 가면서 매달린 것이 허튼짓이었나 싶으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에서 내가 너무 각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잘 작은 빈틈이나 소홀함도 없게 하려고 긴장해 있다. 석 달이나 가족 얼굴을 못 봤는데 그립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몸은 더 지치고 마음은 더 멀어지고 더 지치고 더 멀어지고, 그리고 나는 더 가라앉고.    

 

길가에 카페가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옆에 손바닥만 한 책이 있었다. 아무 생각 들어서 그림책 보듯 넘기는데 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배는 80%만 채워라.” 

몇 장을 더 넘겼다. 한 구절 더 보였다.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시간이라는 스승에게 의뢰하라.” 

조였던 무언가 풀린 듯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가족들이 생각났다. 지금 내가 왜 이 곳을 맴돌고 있을까...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앞지르는 차들이 요란하게 옆을 스쳐 갔다. 목적지 IC에 도착해 보면 저만치 몇 대 앞에 그 차가 보였다. 앞서야 하고 이겨야 하고 그래서 쫓기는 듯 달리고. 너무 심각하게 사는 사람이 나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반겨 매달리는 아이들을 재운 다음 아내에게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바깥일은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걱정할테니 말하지 않는다는 지금까지의 기준을 깬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해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했다.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던 아내의 이 짧은 대답이 그때까지 계속 가라앉던 나를 멈췄다. 그리고 다시떠올라 설 수 있게 했다. 지쳐 무너지던 내게 가장 큰 힘과 위로를 준 사람은 바로 있는 듯 없는 듯 가까이에서 기다려 준 아내였다.     

 

                                                                                                                                                 < 2021. 6.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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