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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May 12. 2021

개구리와 전갈

MZ딸에게 쓰는 꼰대아빠의이야기 2 – 연애에 대하여

  자식을 키우는 기쁨과 아픔의 총량은 같다고 한다. 즐거운 만큼 힘들기도 하다는 말 같다. 많은 부모가 자녀의 대학 진학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는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 주어서 고마웠다. 입학하는 날 나는 대학 생활 동안의 목표를 세워보라면서 세 가지를 목표로 설정해 보라고 권했다. 한 번은 올 에이(A)를 받는 것, 인생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을 찾는 것, 진실한 사랑을 해 보는 것. 


  딸은 그 모두를 욕심냈던 것 같다. 힘들다는 올 에이플러스(A+) 성적을 받았고 인생 진로의 방향을 정하고 체계적으로 준비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남자친구를 데려와서 인사를 시켰다. 단정하고 차분하며 눈빛이 좋은 청년이었다. 둘은 예쁜 그림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사랑에 빠져 구름 위를 걷는 하루 하루를 보내던 녀석이 어느 날 화를 내며 들어왔다.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사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잠시 후 그 친구가 황급히 따라와 해명하는 것을 보면서 오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얼마 없어서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일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그럴수록 딸은 더 집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졸업이 가까운 무렵에 둘이 크게 다투는 일이 생겼고, 그 녀석이 손찌검을 하는 바람에 관계는 완전한 파국을 맞고 말았다.


  사랑이 무너지고 사람에 대한 믿음까지 잃은 딸애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갈수록 불안과 두려움이 커졌고 공황장애까지 앓게 되었다. 진실한 사랑을 해 보라고 했던 내 조언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자꾸 후회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딸이 바라던 직장에 합격을 했으나 나는 도리어 걱정이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앞가슴을 움켜쥐고 출근길 지하도 계단을 여러 번 굴렀다. 그깟 기억 떨쳐내지 못하고 휘둘리며 응급실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속에는 불길이 치솟다 무너지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어느날, 아직 몸도 성치 못한 녀석이 난데없이 여권과 출국서류를 들고 왔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걱정되어 말렸지만 죽으면 죽을 것이라며 떠났다. 


  딸은 그 2년을 외롭고 무섭고 막막해서 울었던 유배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더니 돌아온 딸은 구르며 깎이고 다듬어진 강가의 차돌이 되어 있었다.

  복직을 했고 독하게 일에만 매달렸고 힘든 내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러다 나이 들어버리면 어쩌나 아내와 내가 속으로 앓던 어느 날, 요즘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딸이 말을 꺼냈다. 친구들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인다며 반대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아내와 나의 눈이 반짝 마주쳤다.

  아내는 꼬치꼬치 물었고 아이도 열심히 대답하는데 나는 자꾸 그림들이 떠올라 둘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었다.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애써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전갈이 개구리를 찾아와서 강을 건너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개구리는 독침이 무서워서 거절했으나 전갈은 절대 찌르지 않겠다고 거듭 맹세했다. 둘은 강으로 갔다. 반쯤 건널 무렵 파도가 철렁이자 전갈이 저도 모르게 침을 찌르고 말았다. 가라앉으며 왜냐고 묻는 개구리에게 전갈은 미안해, 나는 전갈이야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이야기했다. 개구리가 죽지 않을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끝까지 거절하거나, 갑옷을 입어서 찔리지 않거나, 독을 이기는 면역 체질로 바꾸는 것. 그런데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개구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전갈은 독침 없는 전갈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아예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라며 말을 마쳤다. 

  딸의 표정이 생각이 많아져 보였다. 자꾸 잔소리가 나오려고 해서 서둘러 일어섰다. 아내는 돌아오는 내내 갖은 걱정을 잔소리로 바꿔서 내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내 머리에는 개구리와 전갈이 내내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여 현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당연한 듯이 내 자식은 개구리라고 정해 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내게 어떤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안타까운 아빠의 심정이 앞서였을까?


  남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그 끝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다. 설령 아픈 인연이거나 그 인연으로 아프게 된다 해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의 인생을 더 깊게 보고 이해하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사랑으로 아파했던 자식의 모습을 보니 흔들리고 말았다. 아이의 아픔이 내게 파고들더니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려는 딸에게 웅크리고 너만 생각하며 살라고 했다. 과거에 붙잡힌 눈먼 아비가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자식에게 어른다운 조언을 하지는 않고 잔소리를 하고 만 것이다. 얼굴이 뜨거워 왔다.


  그날 밤, 딸에게 우리 모두 개구리지만 가끔은 전갈도 되면서 살아간다는 내용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그런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긴 답장이 왔다. 메시지 속에는 어느새 줄기 뿌리 튼실한 나무로 자란 딸이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아픔과 상실의 의미를 길어 올리면서 계절 따라 꽃과 열매를 내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과거에 머물며 안심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나의 모습이 대비되었다. 


  초봄 산책길에 만나는 논에는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과수원도 가지치기하려는지 분주해 보인다. 겨우내 휑하던 마을회관 앞 오동나무도 연두색 잎을 내민다. 장차 저 녀석도 소리 청아한 거문고가 되겠구나. 아마 명장은 나무를 깎기 전에 진이 빠져야 소리가 맑다면서 비바람에 오래오래 세워 두겠지. 

  품을 파고드는 바람이 부드럽다. 올 봄의 꽃은 지난봄의 꽃보다 더 크고 향기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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