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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Jun 05. 2021

장 씨네 논

MZ 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20 – 마음의 바닥 높이기

장 씨는 참 부자다. 아마 우리 동네 옆 들판에서 장씨네 논이 제일 많을거다. 봄이 아직 저만치 오는 듯하면  들판에 나간다. 아예 논 가운데쯤에 땅을 돋아 비닐하우스 둘을 짓고 지낸다. 주변에 경운기와 트랙터, 온갖 기계와 트럭을 즐비하게 둘러 놓고 누런 강아지 한 마리를 보초 세워 놓았다. 나보다 서너 살 아래라는데 벌써 걸음이 구부정하다. 짙게 검붉은 얼굴의 그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인사를 나누어도 눈은 항상 논 쪽을 향하고 있다.   


내 산책길은 들 가운데 농로를 지나 개천 둑길로 이어진다. 농로에서 둑길로 올라서서 이백 걸음쯤 오른편으로 꺾여 가면 장 씨네 논이 보인다. 유독 그 논이 눈을 끈다. 못생겨서다. 주위는 다 반듯한데 유독 그 논만 한쪽 면이 뭉텅 잘린 고구마처럼 길쭉하다. 그리고 바닥이 유난히 낮다. 주위 논보다 얼추 두세 자 넘게 낮아 보인다. 장 씨는 이 논을 두 배는 더 자주 둘러보는 것 같다.


작물은 여름에 가장 열심히 자란다. 뜨거운 볕과 높은 기온 덕분이다. 그런데 농부들은 조마조마하다. 바람과 비 때문이다. 바람보다는 비가 더 걱정이다. 바람이 불면 벼는 휘어지고 흔들리다가 바람이 지나면 다시 몸을 세운다. 물은 벼를 넘어뜨리고 쓸어가 버린다. 불은 흔적이라도 남기나 물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래서 조금 큰비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농부들은 두렁을 살피고 물고를 손질하면서 논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큰비 오고 물이 넘치면 주위의 모든 물이 바닥 낮은 장 씨네 논으로 모여들어서 커다란 수로가 되어버린다. 작년에는 논 전체를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납작하게 쓰러뜨려버렸다. 아예 다리미로 눌러 붙인 모습이었다. 논 밑바닥까지 긁어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매년 저러는데 어쩌누. 저게 논이야? 도랑이지. 아예 바닥을 높여서 밭이나 집터로 쓰는 게 나아. 모두 지나다 멈추어서 안타까워 하며 혀를 찼다. 장 씨는 논 턱에 앉아 한 참을 보고 있었다.     


금 년 초, 논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흙을 실은 트럭이 줄지어 오더니 그 논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불도저로 평평하게 펴고 물을 뿌린 뒤 일주 일쯤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흙을 깔고 물을 뿌렸다. 그렇게 거듭하니 거의 서너 자 이상 바닥이 높아졌다. 5월 초 장 씨가 나와 있었다. 먼 데 산 깎는 데서 흙을 구했다며, 안 그래도 못생긴 논에 물이 해마다 넘쳐 속상했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 없겠지 하며 웃었다. 한 편에 늘여놓은 모판을 가리키며 바닥이 잡히면 모내기를 할거라고 했다. 주위 논들은 모두 달포 전에 모내기를 마쳤다.

       

생각해 보니 이 논에 흙을 채우던 과정이 조금 달랐다. 한 꺼풀 흙을 깔고 물을 뿌려 가라앉히고,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제법 바닥을 높인 다음 두둑하게 논두렁을 쌓아 다졌다.  그런 다음 논에 물을 채우고 트랙터로 깊게 갈았다. 흙탕이 가라앉으면 다시 갈고 또 가라앉혔다. 그러면서 진흙이 두텁게 가라앉아 찐득한 논바닥이 만들어졌다. 옆 논과의 사이에 도랑 깊게 물길도 냈다. 

  

그 일들을 짚다가 내 마음도 저 논처럼 높일 수 있으면 하고 생각했다. 내 마음도 종종 물이 넘친다. 세워 온 것들을 쓰러뜨리고 휩쓸어가 버린다. 벼락 치고 바람 불며 비 내리면 넓지도 않은 마음  두렁 무너지고 바닥까지 쓸려 버린다. 한가하고 여유 있을 때가 아니라 부풀고 분주하며 뭔가 결실이 가까운 듯할 때 더 그런다. 바닥 두텁게 가라앉혀 든든해지면 좋을텐데. 두렁 덧세워서 넘치지만 않아도 자라던 것들 큰 물에도 잘 서 있을텐데. 물 내릴 기세 보여도 제 발 저려 바빠지지 않을텐데. 


어제 지나며 본 장 씨네 논에 물이 넉넉하게 들여있었다. 한 편의 모판도 기운이 푸르렀다. 오늘은 장 씨가 모를 낸다는 날이다. 궁금한 마음이 산책길을 저만치 앞서간다.     


                                                                                                                                                      <2021.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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