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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Jun 06. 2021

새싹을 내지 않는 나무

MZ 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23 – 화분을 옮기며

지난봄, 꽃 색에 홀려 이끌린 듯 길 가 화원에 들어섰다. 모양과 색깔 다양한 꽃과 화초에 취해 온 화원을 돌아다니다가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자그마한 이 녀석을 만났다. 작은 손바닥 같은 잎들을 달고서 품위 있게 나를 맞았다. 다른 계절이 되면 다른 기품을 보여줄 그를 가까에서 보고 싶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내년 또 내후년 이 녀석이 얼마나 자라 어떤 모양이 될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책상 위에 놓고 화분을 깨끗이 닦은 다음 조심조심 잔가지를 다듬었다. 철사로 틀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매일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새로 돋는 연두색 잎이 보이면 더 기뻤다. 

물 주기가 고민이었다. 분재에 가까운 이 녀석을 선뜻 택한 이유에는 물 주기가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리저리 알아봐도 물을 많이 주지 말라는 말만 있었다. 애매하고 답답했다. 그래, 그냥 나무잖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물 주고 영양제도 꼽아 주었다. 여름까지 싱싱하고 푸르른 잎 여럿 더 내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가며 조금 이상한 듯했다. 이 동네에는 구석구석에 단풍나무가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붉은 단풍잎이 제법 넘친다. 그런데 책상 위 저 녀석은 전혀 물들 기색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가뭄을 만난 듯 잎의 끝부터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일교차가 커지면서 단풍이 붉게 물들게 된다고 하던데 실내라서 기온 차이가 크지 않아 그러나? 녀석은 반쯤 마르고 반쯤 푸른 잎들을 매단 채 한겨울 내내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다.


초봄이 되니 녀석 꼴이 더 사납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동네 단풍나무들은 벌써 무성하게 푸르르다. 자연 속에 살던 녀석을 억지로 인간의 삶 속에서 살라고 해서 힘들어 저러나. 그래, 이제 봄이라 춥지 않으니 맘껏 햇볕 쬐고 비 맞고 바람 느껴서 다시 살아나거라 하며 베란다 창문 밖에 내어놓았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는데도 변화가 없다. 초봄 돋아나던 순도 멈춘 채다.  뜨거운 햇볕에 얕은 화분 흙이 바짝 말라버려서 그러나 싶어 물을 살짝 적셔주어도 여전히 변화가 없다.


올봄 호기심으로 심은 아보카도 씨가 제법 힘 있게 싹을 틔우더니 이제는 키가 거의 한 뼘 넘게 자랐다. 부러워하는 딸에게 화분을 만들어 줘야지 생각하고 흙을 사러 화원에 들렀다. 아저씨에게 화초 물주는 게 어렵다고 하소연했더니 그게 화초에게 밥을 주는 일이라면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쉬울 리 있느냐고 한다. 단풍나무  때문에 답답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놀랍게도 물을 너무 많이 주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놈은 물을 많이 주면 잎을 모두 떨구고 가만히 있는다고, 목숨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오래 걸리더라도 물 주지 말고 어떤 변화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면서 지켜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살던 집 뒷마당의 키 큰 당단풍나무가 생각났다. 이끼 덮인 응달에 서 있던 그 녀석은 몸 왼편이 썩어 곰팡이가 났으면서도 나머지 오른편에 달린 가지에 잎을 내어 단풍을 들이곤 했다. 그놈을 보면서 단풍나무는 습한 땅을 싫어한다는 것을 배웠으면서도 그런 실수를 한 것이었다. 


돌아와 미안한 마음으로 녀석을 바라보면서 아저씨 말을 떠올리노라니 내가 종종 슬쩍 보고 설피 알고 섣불리 판단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초에게는 물을 많이 주는 거 아니라는 주인 모를 말을 얼핏 듣고 키우다가 여름철 더위에 거의 태워 죽일 뻔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로 너무 물을 많이 주어서 아이를 죽일 뻔했다. 그래, 누구에게 무엇을 해 줄 때는 알아보고 그의 기준 그의 필요에 맞춰야 하는 것이지. 내 기준 내 필요가 아니라. 


거리에 나섰다. 노을 내리는 빌딩 사이로 바쁜 얼굴의 젊은이들이 밀물로 흘러왔다 썰물로 흘러간다. 저마다 반쯤 마른 단풍잎 닮은 봉투와 가방을 흔들고 있다. 그들을 키운다고 우리가 분주한 동안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필요하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주어왔을까. 한겨울 얼음 땅도 뚫고 솟아나는 그들 안의 생명력을 보지 못하고 그저 더 많이 주면 더 좋을 거라 믿다가 이 좋은 봄날 앙상한 가지로 선 또 한그루의 단풍나무가 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노한 그들이 지금 우리를 향한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었다 다시 살아나 어느덧 촉 다섯 개를 돋아 올리는 난초를 옆자리로 옮기고 앙상한 단풍나무를 놓았다. 이놈이 다시 아기 손바닥 같이 예쁜 잎사귀들을 흔들어줄까. 나는 자꾸 물병으로 손을 뻗는 유혹을 눌러 이길 수 있을까. 앙상하게 서 있는 녀석에게 매일 나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을 일깨워다오 말을 걸면서 화분을 닦는다. 그나마 줄기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보며 적이 위안을 받는다. 


                                                                                                                                                   <2021.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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