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사장, 미안하고 후회합니다

MZ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26 –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by 강한진

호기와 건방 넘치던 초년 직장인 시절, 새벽처럼 깊은 바다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돌고 슬쩍 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자르는, 한눈에 알아보는 칼이 되고 싶었다. 좋은 주인의 손에 들려 힘 안 들여도 주인의 마음을 읽어 움직이는 명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유능함과 성공만 생각했던 그 시절은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일은 얻었으나 사람은 잃어 있다. 작은 성취는 이룬 듯 하나 즐거움은 갖지 못했으며, 약간의 재물은 남았으나 편한 여유는 곁에 있지 않다. 나의 그 무디고 어설픈 칼은 수많은 상처를 냈고, 내 몸에도 자국 여럿을 남겼다. 아물었으나 건드리면 아픈 허물, 그 많은 허물 중 하나가 김 사장이다.


뒤돌아 보면 나를 승진시킨 것은 세운 공도 유능함도 아었다. 김 사장을 알게 된 것은 새 부서의 관리자가 되어 자리를 옮긴 후였다. 그는 제법 큰 납품회사 대표였다. 어느 날, 관계나 친분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거래하려고 하던 내게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선물을 했다. 내 기준에 어긋났다. 그래서 칼같이 잘랐다. 그는 계약 상대에서 제외되었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적당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간의 관계를 배려해 주라는 말도 했다. 나는 원칙의 문제라며 듣지 않았다. 원칙이라는 것은 갑에게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무기가 되지만 을에게는 몸과 마음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지 못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동시에 필요할 때는 먼저 너그러움을 선택하라는 선인의 가르침을 그때 이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후 편벽됨과 어리석음 때문에 크게 아팠을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내 마음속 작은 조약돌이 되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일 년쯤 후 어느 날, 회사 현관문을 들어서는 김 사장을 만났다. 조금 초췌하고 지쳐 보였다. 그 무렵 김사장이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중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어색하게 웃는 김사장의 깊은 눈은 뭔가 할 말이 담겨 있는 듯했으나 짧은 목례만 나누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빈 그릇 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그냥 온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서야 그 빈 그릇이 무엇인지 조금씩 느껴졌다. 반갑다면서 붙잡고 차나 한잔하자 할걸, 어떻게 지내느냐며 너스레라도 떨어볼걸, 도와드릴 일 없느냐며 말 붙이고 미안했다고 은근히 전해볼걸. 그랬다면 지난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미안함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던걸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겁함이 기회를 밀어 흘려보냈다. 나의 부끄러움은 더 크고 깊어졌다. 마음 속 조약돌은 주먹만 하게 자라났고, 마음도 더 가라앉았다.


10년쯤 후 회사를 그만두고 나 혼자 무언가를 시작했다. 뭔가를 해 보려고 좌충우돌하다가 조금씩 지치고 외로워질 무렵 김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화였다. 반갑고 또 고마웠다. 그는 내 소식을 알고 있다고 했다. 만나자고 했다. 나는 사과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하며 약속한 곳으로 갔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차츰 화가 났다. 놀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을까. 내가 성급했을까. 조금 더 기다릴 걸. 다음날에라도 전화할걸. 그랬다면 다시 약속할 수 있었을 텐데. 깜빡 했겠지 하고 넘길걸. 그러면 내가 좀 더 가벼울 텐데. 잘못이 훨씬 크면서 성을 내 버렸구나.

그런데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마음속 돌멩이는 더 무거워졌고 그것을 지고 넘어야 할 언덕도 산등성이만큼 높아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로 다른 삶들이 잠시 엉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젊은 날의 서투르고 불비한 인품이 만들어 낸 매듭이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의 자국이 옅어질까 했으나 세상에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 상처는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을 먹으며 자라 또 다른 상처로 이어졌고, 시간이 그 이어진 것들을 비추자 후회라는 커다란 그림자를 안고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되돌리면서 사람은 더 사람다워지고고 지혜로워져 간다는데 나는 아직도 무거운 채로 가라앉아만 있는 것이 부끄럽다.

마음속 돌멩이를 쓰다듬는다. 다시 커다란 산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조용히 나를 덮어 가라앉힌다. 걷어내지 못하는 용렬함을 먹으며 부끄러움이 더 커지고 있다.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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