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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진 Jun 09. 2021

김 사장, 미안하고 후회합니다

MZ딸에게 쓰는 꼰대 아빠의 이야기 26 – 벗어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

  호기와 건방 넘치던 초년 직장인 시절, 새벽처럼 깊은 바다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돌고 슬쩍 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자르는, 한눈에 알아보는 칼이 되고 싶었다. 좋은 주인의 손에 들려 힘 안 들여도 주인의 마음을 읽어 움직이는 명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유능함과 성공만 생각했던 그 시절은 지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일은 얻었으나 사람은 잃어 있다. 작은 성취는 이룬 듯 하나 즐거움은 갖지 못했으며, 약간의 재물은 남았으나 편한 여유는 곁에 있지 않다. 나의 그 무디고 어설픈 칼은 수많은 상처를 냈고, 내 몸에도 자국 여럿을 남겼다. 아물었으나 건드리면 아픈 허물, 그 많은 허물 중 하나가 김 사장이다.     


  뒤돌아 보면 나를 승진시킨 것은 세운 공도 유능함도 아었다. 김 사장을 알게 된 것은 새 부서의 관리자가 되어 자리를 옮긴 후였다. 그는 제법 큰 납품회사 대표였다. 어느 날, 관계나 친분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거래하려고 하던 내게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선물을 했다. 내 기준에 어긋났다. 그래서 칼같이 잘랐다. 그는 계약 상대에서 제외되었고 그 후 여러 해 동안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적당히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간의 관계를 배려해 주라는 말도 했다. 나는 원칙의 문제라며 듣지 않았다. 원칙이라는 것은 갑에게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무기가 되지만 을에게는 몸과 마음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지 못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동시에 필요할 때는 먼저 너그러움을 선택하라는 선인의 가르침을 그때 이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후 편벽됨과 어리석음 때문에 크게 아팠을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내 마음속 작은 조약돌이 되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일 년쯤 후 어느 날, 회사 현관문을 들어서는 김 사장을 만났다. 조금 초췌하고 지쳐 보였다. 그 무렵 김사장이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중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어색하게 웃는 김사장의 깊은 눈은 뭔가 할 말이 담겨 있는 듯했으나 짧은 목례만 나누고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빈 그릇 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그냥 온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서야 그 빈 그릇이 무엇인지 조금씩 느껴졌다. 반갑다면서 붙잡고 차나 한잔하자 할걸, 어떻게 지내느냐며 너스레라도 떨어볼걸, 도와드릴 일 없느냐며 말 붙이고 미안했다고 은근히 전해볼걸. 그랬다면 지난 어리석음을 조금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미안함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던걸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겁함이 기회를 밀어 흘려보냈다. 나의 부끄러움은 더 크고 깊어졌다. 마음 속 조약돌은 주먹만 하게 자라났고, 마음도 더 가라앉았다.  

   

  10년쯤 후 회사를 그만두고 나 혼자 무언가를 시작했다. 뭔가를 해 보려고 좌충우돌하다가 조금씩 지치고 외로워질 무렵 김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화였다. 반갑고 또 고마웠다. 그는 내 소식을 알고 있다고 했다. 만나자고 했다. 나는 사과할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하며 약속한 곳으로 갔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여러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차츰 화가 났다. 놀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뭔가 급한 일이 생겼을까. 내가 성급했을까. 조금 더 기다릴 걸.  다음날에라도 전화할걸. 그랬다면 다시 약속할 수 있었을 텐데. 깜빡 했겠지 하고 넘길걸. 그러면 내가 좀 더 가벼울 텐데. 잘못이 훨씬 크면서 성을 내 버렸구나. 

  그런데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마음속 돌멩이는 더 무거워졌고 그것을 지고 넘어야 할 언덕도 산등성이만큼  높아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서로 다른 삶들이 잠시 엉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젊은 날의 서투르고 불비한 인품이 만들어 낸 매듭이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의 자국이 옅어질까 했으나 세상에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 상처는 어리석음과 어리석음을 먹으며 자라 또 다른 상처로 이어졌고, 시간이 그 이어진 것들을 비추자 후회라는 커다란 그림자를 안고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되돌리면서 사람은 더 사람다워지고고 지혜로워져 간다는데 나는 아직도 무거운 채로 가라앉아만 있는 것이 부끄럽다. 

  마음속 돌멩이를 쓰다듬는다. 다시 커다란 산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조용히 나를 덮어 가라앉힌다. 걷어내지 못하는 용렬함을 먹으며 부끄러움이 더 커지고 있다.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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