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다시 읽다 10 – 순욱
얼마 전까지 가장 인정받는 참모였다가 이제는 방해물이 되었다고 느껴졌을 때 순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조조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은 순욱 자신이다. 선택하기 전에 많은 대상을 비교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을 했을까? 주군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꿈을 이루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방향과 목적과 방법의 결정 주도권이 주군에게 있다는 것이다 참모는 보조자다. 주군의 목적이나 목표가 변하거나 건의한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모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순욱은 황실주의 이념이 두터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순욱이 조조를 주군으로 선택한 것은 조조가 한나라를 위해 간신들을 제거한 적이 있어서다. 조조에 대한 그의 헌신은 황실 보전을 위한 방법이었으며,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어서 여러 사람의 믿음과 덕망을 얻으라고 전략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마음은 달랐다. 조조의 목적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 뿌리 생각의 어긋남이 구석(九錫) 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며, 그것을 확인한 조조는 순욱을 서서히 멀리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어냈다.
순욱은 조조가 간웅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주군으로 섬겼을까? 한 가지 힌트는 그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지략과 능력으로 주군을 움직이고 이끌어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면 가르치고 부족하면 보좌하고 잘못하면 바로잡아서 이끌 자신 말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후안흑심(厚顔黑心)의 조조였으며, 실제로 어느 신하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사실 역사 속 대다수 영웅이 남보다 더 두꺼운 얼굴을 하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비열하고 잘못된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영웅으로 성공하는 길이었으며, 성공한 뒤에는 역사가 잘못한 것 까지 덮어 미화해 주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러하며 심지어 인의의 대명사라는 유비도 얼굴 두꺼운 위선자라는 비판을 듣는다.
순욱이 조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황제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조조가 지방의 제후들에게 토벌군에 참여하라는 격문을 보냈을 때다. 제후들은 천자를 등에 업고 자신들을 휘두르려는 조조의 속셈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한 부대를 이끌고 유비가 나타났다. 당시 조조는 유비가 장차 자신의 큰 적수가 될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두면 언젠가 속을 썩이겠고 제거하려니 인의의 영웅을 제거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순욱, 손유, 곽가에게 물어봤다. 의견이 모두 달랐다. 그 중 순욱은 제거하자고 강력히 제안한다. 왜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제거하자고 했을까? 인의라는 유교적 가치보다 현실적 정권 쟁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후환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순욱은 자신의 지략과 능력으로 조조를 보좌해서 황실 존중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참모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발견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노력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 그러나 참모는 주군의 울타리 안에서 주군을 통해 이루는 존재이지 내가 직접 이루는 데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 존재다.
참모의 생각과 주군의 생각이 어긋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슷한 상황의 참모 이야기가 몇 전해진다. 첫째는 장량이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내정의 안정을 위해 대대적으로 공신들을 숙청한다. 공신은 공적이 크고 군사력도 가지고 있어서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때 어정쩡하게 처신한 대장군 한신은 토사구팽이라는 고사를 남기며 제거되었으나 장량은 신선이 되겠다며 속세를 떠나 살아남는다. 서열 2위 소하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비굴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처세의 달인이라는 진평도 매일 술과 향락에 빠져 정사나 권력에는 전혀 관심 없는 모습을 보여 위기를 모면한다.
둘째는 같이 조조 휘하에 있던 서서(원적)다. 그는 원래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의 수하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조조가 유비를 징벌하러 보낸 2만 군사를 간단히 처리해버린다. 그 정보를 입수한 조조는 서서를 빼내려고 이른바 ‘원적 노모 납치 인질 사건’을 벌인다. 서서는 유비와 헤어지면서 ‘조조를 위해서는 어떤 계책도 내지 않겠다’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자기 대신으로 제갈공명을 영입하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서서는 조조의 막내아들 조충의 스승이 되나 아무 계책도 내지 않는다.
만일 서서가 아무런 약속이나 자신을 대신할 사람도 추천하지 않고 그냥 떠나려고 했다면 보내 주었을까? 훗날 조조의 아들 조충이 죽자 자신의 역할이 더 없다면서 노모와 함께 낙향하자 조조는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려 했던 일과 비교하며 생각해 볼 부분이다.
리더와 부하, 리더와 참모의 관계는 실제로 매우 복잡 미묘하고 역동적인 관계다. 같은 목표를 추구할 때는 신뢰하고 의지하며 협력하나 일단 목표와 방법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면 복잡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부하 또는 참모에게 리더를 위협할만한 힘과 영향력까지 있다면 문제는 더 미묘하고 복잡해진다. 어떻게 처신할지는 부하의 판단과 선택의 몫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리더를 믿는 것에서 나온 자신감은 질적으로 다르다. 참모란 무엇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리더가 무엇을 이루도록 돕는 존재다. 내 능력으로 리더를 움직여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은 종종 허무한 결과로 끝을 맺는다. 왕좌지재(王佐智材)라던 순욱은 50세의 나이에 자결했다.
회자되던 ‘비서는 입이 없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능력을 자신하는 참모가 빠지는 함정과 그 결과를 생각해본다. (完)
<2021.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