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다시 읽다 9 – 순욱
삼국지에서 가장 뛰어난 책사는 누구일까? 제갈공명?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제갈공명의 촉나라는 가장 먼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비해 위나라는 삼국을 통일해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그 승리의 기틀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순욱을 최고의 참모요 보조자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는 활동하기 훨씬 전부터 왕좌지재(王佐至材)라고 소문난 인재다. 당시 외척과 내시의 세력에 밀려서 겉돌게 된 호족 세력들은 자신들은 청류파, 외척과 내시들을 탁류파라고 불렀다. 그리고 중앙 무대에 발을 들이지 못하자 천하를 돌아다니며 섬길만한 사람을 찾으려 했다. 원소도 호족 세력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제법 사회적 이슈가 될 물의도 일으킨 적 있는 청류파의 일원이었다. 반면 조조는 할아버지가 뇌물로 태감 벼슬을 사서 지위를 획득한 탁류파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나 청류파와 어울리고 비슷한 생각을 한 어울린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순욱은 청류파적 동질감 때문이었는지 처음에는 원소를 주군으로 섬겨보려고 했던 것 같다. 동탁 제거를 명분으로 세력을 형성하던 원소에 대해 세상 평가가 매우 긍정적인 상황이기도 했다. 원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당시 영웅들간의 다툼은 인재와 병력과 물자의 경쟁이었다. 순욱은 매우 소문난 인재였다. 인재는 인재를 끌어들인다. 결국 더 많은 청류파 인재를 영입하기 쉬워진다.
그러나 순욱은 오래 걸리지 않아 원소의 한계를 파악하고 발길을 돌려 조조를 향한다. 조조는 순욱을 맞으며 ‘나의 장자방’이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조조가 장자방이라고 부른 인재는 순욱이 거의 유일하다.
순욱은 전쟁에 대해서는 전략을 제시하고 후방에 있어서는 내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최고의 역할을 해낸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헌한 장량과 소하 두 사람 몫을 해 낸 셈이다. 조조도 중요한 일은 모두 순욱과 의논했다. 순욱의 핵심적인 공헌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인재가 모여드는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 집단은 대부분 지방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들을 모으면 지지기반이 자연히 전국으로 넓어진다. 황제를 모셔서 천하의 중심이 된 이점도 컸다.
순욱을 구심점으로 청류파 인재들이 모임으로써 조조의 위나라는 성장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참모 중 순유, 곽가, 사마의 등이 순욱을 통해서 영입되었다. 조조의 위나라 인재풀은 유비의 촉나라나 손권의 오나라에 비해 수와 양 모두 월등했다. 삼국 쟁패의 경쟁에서 선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핵심 전략을 제시하고 정신적으로 뒷받침했다. 조조의 초기 순욱은 허창을 세력의 근거지로 삼고 기초를 튼튼히 하여 세력을 키우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모든 영웅이 무시하던 황제(천자)를 받아들이도록 제안해서 제후들보다 한 단계 높은 대의명분과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열 배가량 큰 원소의 세력에 맞서 싸운 관도대전에서 끝까지 버티라고 조조를 격려한다. 이때 제시한 원소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조조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조조에게 커다란 정신적인 자신감을 주었다. (곽가, 정욱 등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들 모두 순욱과 함께 원소에게 갔다가 실망하고 조조에게로 온 사람들이다. 아마 원소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이기고 원소를 제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원톱의 위치를 굳힌다.
셋째는, 최고의 보좌를 했다. 순욱은 조조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파악했다. 신하들이 조조의 심중을 아리송해할 때 순욱이 깨우쳐주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리고 관도대전에서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라 자신감을 잃고 후퇴할 뜻을 보일 때 조조의 심중을 정확히 읽고 마음의 불안감을 일소해서 자신감을 회복하도록 보좌한다.
원소의 참모였던 허유가 귀순하면서 원소의 결정적 약점을 알려주어서 관도대전의 역전승에 크게 기여하는데 그 후 너무 무례히 행동하자 참지 못한 허저가 그를 죽이고 만다. 그 일로 허저가 조조에게 처벌을 받고 서운해하자 조조의 진심을 알려주면서 다독이는 등 조조와 신하들과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 균형 역할을 하고 적절한 행동을 이끌내어서 보좌한다. 그러한 순욱에 대해 조조는 ‘내게 이런 부하가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라며 심기일전한다. 좋은 보좌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환상적인 호흡으로 큰 성공을 만든 조조와 순욱의 관계도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관도대전에서 최강자 원소를 꺾고 지방 제후들이 거의 다 제압되자 조정 신하들은 조조의 작호를 국공(國公)으로 높이고 구석(九錫)을 수여하자는 상소를 준비한다. 황제가 되라는 최고의 아부였다. 그러면서 순욱에게 의견을 물었다.
순욱은 딱 드러내어 반대를 하지 않았으나 구석(九錫)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구석이란 공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아홉 가지 물건을 말하는 데, 이것은 황제가 자리를 위양 할 뜻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정의 신하들이 조조에게 아부하려고 황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순욱은 ‘승상(조조)은 천자를 위한 충성심으로 지금까지 일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군자의 태도다. 지나친 일은 삼가는 게 좋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이 순욱이 가진 조조라는 주군에 대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마음이 평온치 않다’라고 반응한다. 참모의 말에 마음이 평온치 않다? 지금까지 순욱은 없어서는 안 될 참모였다. 그런데 이제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것일까. 그 후 순욱은 점차 정권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게 된다. (계속)
<2021.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