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는 미래 대한민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는 초석이다.
오늘은 한국사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실록> 의 조선 창업 군주 제3대 태종(이방원)의 연재(1)을 합니다. 참고로 제가 2년 동안 쓴 한국사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출판사에서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연재한 내용은 블로그 지면 관계로 요약을 하여 올리는 점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코로나19에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의 기틀을 다진 창업 군주 왕. 재위 기간 : 1400년 ~ 1418년
태종은 고려 말에 과거 급제 후 명나라의 사신으로 이색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를 죽이고,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조선 창업의 기틀을 다진 왕이지요. 조선 개국 이후,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한씨 소생 아들들을 외면하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 아들을 세자를 정한 부왕 태조와 정도전에 반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어요.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 공신들을 축출하고 처남과 사돈 등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했어요. 태조 이후 왕권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져서 조선의 창업 군주로 평가받고 있어요.
남다른 총명함과 재능 소유자, 이방원
태종은 1367년(공민왕16)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어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름은 방원, 자는 유덕이지요. 방원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태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자라면서 유학 공부에도 심취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1383년(우왕9)에 17세로 문과에 급제했어요. 태조 이성계는 무인 집안에 학자가 한 명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방원에게 학식이 높은 선비를 붙여주고 여러 선비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지요. 방원은 글만 읽는 선비가 아니었어요. 방원은 아버지 못지않은 무인의 기질과 큰 야망이 있었어요.
방원의 야망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392년(공양왕4)에 정적 정몽주를 제거한 것이지요. 정몽주는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이성계가 이색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어요.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은 친명파로서 위화도 회군을 지지하고 고려의 정치 개혁에도 동참했어요. 정몽주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는 반대했어요.
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역성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1389년(창왕1) 10월 11일, 방원은 이성계의 생일날 정몽주와 변안렬을 불러 〈하여가〉를 부르며 역성혁명에 참여 여부를 타진했어요.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렬은 〈불굴가〉를 불러 역성혁명에 반대를 분명히 했어요. 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죽였어요. 이 일로 방원은 이성계의 미움을 사게 되었지만, 조선 창업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어요. 태조 이성계의 새 왕조를 열고자 했던 꿈은 방원의 꿈이기도 했어요.
조선의 창업 군주 태종
왕위에 오른 태종은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개선했어요. 첫 신호탄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왕의 고명(중국의 황제가 벼슬아치에게 주던 임명장)과 인신(옥새 또는 도장)을 받은 것이었어요.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국 왕에게 주는 일종의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장이지요. 동아시아의 외교 관계에서 종주국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어요. 조선은 개국 후 10년이 지나도록 명나라의 고명과 인신을 받지 못했어요. 조선 개국 초기 정도전의 요동 정벌 계획 등 외교적 마찰과 명나라의 내부 문제 때문이었어요. 태종이 즉위한 후에 고명과 인신을 받게 되었어요. 태종이 스스로 창업 군주로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어요.
대외적으로 친명 노선을 강화한 태종은 1401년(태종1)에 명나라 혜제(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데 이어, 1402년(태종2)에는 하륜(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문신)을 명나라에 보내 등극한 성조(명나라의 제3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고명과 인신을 새로 줄 것을 요청했어요. 명나라 성조는 조카 혜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어요. 이미 혜제로부터 고명과 인신을 받은 조선에서 자신에게 새로 고명과 인신을 받겠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지요. 이를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바뀌었어요. 태종의 외교적 수완이 그만큼 뛰어났어요.
태종은 대외적 안정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하며 새 왕조의 임금다운 업적을 하나둘 이루어 나갔어요. 먼저 정종이 개경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했어요. 아버지 태조로부터 인정받는 열망으로 태종이 아버지 때에 설계한 한양에 수도를 다시 옮겼어요. 태종은 1405년(태종5)에 창덕궁을 새로 지어 경복궁과 번갈아 가며 머물렀어요. 경복궁은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 세우고 왕자의 난으로 희생된 방석과 방번 형제가 머물던 곳이었어요. 태종이 새 궁궐을 지어 양궐(두 개의 궁궐) 체제가 시작되어 강력한 왕권의 통치 기반이 될 한양도 위엄을 갖추었고 강력한 국가 건설에 힘썼어요.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다
정적에 대한 과감한 제거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한 태종은 개국에서 왕조 시대를튼튼하게 하는 정치적 과업을 달성했어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어요. 자신의 대를 이어 왕조 시대를 굳건히 이어갈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1404년(태종4)에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 양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했어요. 이때 양녕은 11세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난 양녕은 공부보다 말타기, 활쏘기 등을 즐겼어요. 성인이 된 후에는 여자들을 좋아해 자주 궁궐 밖으로 나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어요. 완벽을 추구하는 태종에게 이런 양녕이 눈에 차지 않았어요.
태종은 스스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무시하고 왕위에 오른 부담으로 장자 양녕을 쉽게 내칠 수 없었어요. 양녕이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어도 보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태종도 더 이상 참지 못할 일을 양녕이 저지르고 말았어요. 평소 기생부터 일반 백성 부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놀아나던 양녕이 곽선의 첩 어리와 간통을 저질렀어요. 양녕은 어리에게 완전히 빠져서 동궁전에 데려다 놓고 매일 정을 통했어요.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노발대발하여 어리를 궁중에서 내쫓으라고 명했어요. 양녕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어리를 장인 김한로의 집에 숨겨 두고 몰래 만났어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노해 김한로를 귀양 보내고, 양녕을 폐위절차에 들어갔어요.
1418년(태종18), 태종은 양녕을 폐하고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았어요. 처음부터 태종이 충녕을 세자로 내세운 것은 아니었어요. 태종은 신하들에게 "양녕의 두 아들 중 첫째로 하여금 세자의 자리를 잇게 할 것이니 왕세손이라 칭할지, 왕태손이라 칭할지 의논해 아뢰라."라고 했어요. 양녕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 폐하지만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다시 깨고 싶지 않아 양녕의 첫째 아들로 왕조를 잇고자 했어요. 이때 양녕의 첫째 아들은 다섯 살이었어요.
<헌릉_태종&원경왕후_2018.9.26 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