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역사는 미래 대한민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는 초석이다.

by 책걸음동무 김흥중

안녕하세요? 전자공학을 전공한 기업체 CEO 출신으로 《수능국어 고득점을 위한 현대문법 어문규정》외 7권 저자 김흥중입니다. 제가 2년 동안 집필하고 있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실록>(가제)를 연재(2)합니다.

청소년_조선왕조실록_말 탄 장군-원본.png


조선 개국과 제1대 태조 고황제 이성계


개요

조선 제1대 태조 고황제 이성계는 고려의 뛰어난 무장으로 1392년 개경(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어요.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어요. 명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 정책을 썼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어요.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어요. 말년에는 한양으로 돌아와 불도에 정진했어요.


태조 이성계.jpg

<태조 이성계 어진>


태조의 등극, 조선왕조 500년이 시작되다.

살기 위한 선택으로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했지요.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세우는 혁명의 시작이었어요.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된 우왕을 대신해 그의 아들 창이 왕위에 올랐어요. 이색과 조민수, 변안렬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어요. 우왕의 아들이 왕이 된 것에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세력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1389년(창왕1)에 김저는 정득후 등과 함께 유배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죽이려고 모의한 사실이 발각되었어요. 이성계는 우왕을 죽이고, 창왕과 창왕의 지지 세력 이색, 조민수, 변안렬 등을 귀양 보냈고 처형했어요. 1389년(공양왕 즉위)에 신종의 7대손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지요. 이성계 일파는 신돈의 아들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왕씨를 세운다는 '폐가입진론'을 주장했어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었어요. 이성계 일파의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어요.

이성계는 1392년(공양왕 4) 7월 17일에 공민왕비 정비의 명과 문무백관의 추대로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어요. 위화도에서 회군한 무장 이성계가 왕이 되었어요. 이성계는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이 국새를 가져오자 한사코 거절했다고 해요. 실록에 따르면 "두려운 마음에 온 조정를 잃었다."라는 표현도 나와요. 자기가 하고 싶어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천명과 인심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성계는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실로 덕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라며 사양했다고 해요. 모든 신하가 거듭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하니 마침내 그 뜻을 받아들였어요. 475년을 이어 온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어요. 이때 이성계의 나이 58세였지요.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한 다음 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고 해요.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기뻐했어요.


국호 제정과 한양 천도, 조선의 디자이너 정도전

급격한 사회변화가 백성들과 기존 세력들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하였지만 고려 왕조와 차별화하면서 새 왕조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해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어요. 새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즉위 한 달 만에 도읍지를 옮길 결심을 했어요.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도읍지도 개경으로 삼고자 했어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농본주의, 숭유억불, 사대교린을 국시로 삼고, 조림을 명나라에 보내 자신의 등극을 알렸어요. 밀직사사 한상질을 명나라에 보내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 받았어요. 1393년 3월 27일(태조2년) 새 국호를 ‘조선’으로 제정했어요. 단군 이래 우리 역사에서 나라의 이름을 중국에 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이 일 때문에 태조 이성계는 자주적인 태도를 버렸다는 오명을 갖게 되었어요.


1394년(태조 3년)10월, 태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에서 한양으로 왔어요. 새 도읍지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지요. 12월부터 궁궐 건축을 시작했어요. 왕씨의 본거지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어요.


1395년(태조 4년) 9월, 중앙에 경복궁과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이 완성되었어요. 이듬해에 북으로 백악산(서울 북악산), 동으로 낙산(서울 동대문 부근 산), 남으로 목멱산(서울 남산), 서로 안산(서울 신촌 부근 산) 잇는 도성과 사대문이 완성되었어요. 정도전은 모든 공사를 지휘, 감독했으며, 궁궐과 사대문의 이름을 직접 짓는 등 새 도읍의 설계자로서 역할을 다했어요.


태조 이성계의 평가

고려의 뛰어난 무장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왕으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어요. 태조 이성계는 국가 통치 3대 정책, 정치적 외교는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 정책, 경제적으로 농본민생주의로 농업을 장려, 문화적으로 숭유배불주의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기본으로 나라를 통치했어요.


태조 이성계는 민심과 천심을 바탕으로 조선왕조 개국의 정당성과 조선의 통치이념, 민본주의 정치사상으로 국가는 왕의 것이 아니라 민심이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왕이었어요.

태조 이성계는 자식들의 왕권 다툼에 힘겨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왕으로 나라는 잘 통치하는 좋은 왕이었지만 아버지로서는 부족함도 많은 왕이었어요. 태조 이성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왕이지요.


태조 이성계의 승하

이성계는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상왕(왕위를 물려주고 생존해 있는 앞시대의 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이 되었어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못마땅했던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떠나 소요산, 함주(지금의 함흥) 등에서 사냥을 하고 불공(부처 앞에 향, 등, 꽃,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을 드렸어요. 함주에서 이성계는 안변부사 조사의와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했어요. 패전을 모르는 맹장에서 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성계는 자식들의 다툼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했어요.

묘호는 태조,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능은 건원릉이지요. 건원릉은 태조의 단릉으로 봉분은 잔디가 아닌 함경도 영흥(이성계의 고향) 지역의 억새풀로 덮여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에 있는 동구릉에 있어요.


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고황후 한 씨의 능호는 제릉으로 북한 개성시 있으며, 둘째 부인 신덕고황후 강 씨의 능호는 정릉으로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에 있어요.


건원릉 억세.jpg

<건원릉 억새>

다운로드 (1).jpeg

<건원릉 전경>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