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그리고 가을, 웃음 그리고 눈물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건너가듯,
자기에게서 또 다른 자기로 건너가려는 사람이 있다.
‘모월 모일’ -박연준
‘설레발’ 대신 ‘오리발’을 택하는 편이다. 어떤 일에 서두르며 부산하게 굴기보다, 딴전을 부리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잘 기다리는 성격이란 얘기다.
주로 기쁜 일 앞에서 그랬다. 안 좋은 일은 최대한 빨리 알아서 순식간에 인정하고 얼른 잊어버리려 노력했고, 좋은 일은 최대한 늦게까지 기다렸다가 수락하고 오래오래 그 여운을 즐기려 했다. 내가 슬픔과 기쁨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폭죽처럼 팡팡 터지는 행복한 일들이 내 삶에 자주 없었어서 어쩌다 갑자기 나에게 서프라이즈 같은 행운이 찾아오면 설레발 떨며 기뻐하기보다 오리발 내밀며 ‘에이 설마 이 행복이 내 것이겠어?’ 부정했다. 그러다 진짜 내 것이 맞으면 그제야 방방 뛰며 즐길 수 있었다.
슬픔은 당연했고 기쁨은 생뚱맞았던 내 생이여. 하지만 듬성듬성 인 행복이었어도 그 여운으로 힘내며 살아갈 수 있었다. 하긴 행운이 자주였다면 기쁘지도 않았을 터. 불행이 지천으로 깔려 있어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다 마주하는 행복이라 더 반가웠다. 마음껏 기뻐했다.
임신 앞에서도 나는 어김없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선명한 두 줄의 테스트기를 확인하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지난밤이었다. 그건 아침의 몫이었다. 날이 밝아오면 말끔히 세수하고 병원에 가야지. 피를 뽑고 검사 결과가 나오면 그러면 설레발쳐야지. 정말인가? 진짜인가? 확실한 건가? 최대한 미루고 미루다가 정말이야! 진짜야! 확실하게 임신이야! 펑! 펑! 이 행복 가득한 폭죽을 저 하늘 높이 터뜨려야지 생각했다.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지금 한 마리의 오리가 되는 거야. 내 발은 오리발이야. 잘 내밀어. 그리고 혹시 몰라 만약 임신이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나를 다그치며 속으로 꽥꽥댔던 간밤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리에서 사람으로 돌아와 설레발을 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침이 되었고 병원에서 피검사를 한 후 집에 돌아왔다. 두세 시간 후쯤 수치 확인 문자가 갈 거라고 했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몸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몸은 분명 앉아 있는데 맘이 들떠 자꾸만 일어서야 했다. 두 시간 이십 분쯤 흘렀을까. 짠. 문자가 왔다. 내 문자 알림 소리는 분명 ‘띵’ 소리에 가까웠는데 이상하게 문자가 ‘짠’하고 왔다.
‘임희정님 임신수치혈액검사결과 임신입니다. 내원하셔서 초음파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임신입니다. 임신입니다. 임신입니다. 저 두 줄의 문장 중 ‘임신입니다’ 다섯 글자가 이렇게 튀어나와 보일 줄이야. 임신이었다. 임신이다. 내 피가, 검사 결과가, 문자가 증명한 진짜 임신!! 펑! 펑!
사실 문자를 보고 임신이라 기쁘다기보다 뭐랄까 좀 이상했다. 기쁜 만큼 당황스러웠고 좋은 만큼 믿기지 않기도 했다. 믿기 힘들 만큼 크게 좋은 앞에서 사람의 감정은 부끄러움을 타는듯 했다. 수줍고 무안해서 한 가지 기분으로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임신이 되었다고 당장 무언가를 해야 할 건 없는데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꿀렁거렸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모른 채, 뭘 해야 할까 뭘 하면 좋을까만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 퇴근하고 올 남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집 앞 빵집으로 가 손바닥만 한 케이크 하나를 사 왔다. 왠지 모르게 그래도 일단 축하해야 할 일인 것 같았다.
남편과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숟가락을 들기 전 나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 둔 미니 케이크를 꺼낸 후 그 옆에 흰 봉투를 나란히 같이 올려놓았다. 웬 케이크고 어찌 된 봉투인지 어리둥절했던 남편은 봉투 속을 열어보더니 굳어버렸다. 용돈도 서류도 아닌 임신테스트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선명한 두 줄처럼 이제 두 명의 사람이 또렷하게 엄마 아빠가 된 것이다.
생각보다 요란하거나 난리법석이거나 감동스러운 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린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그걸 온전히 즐길 여유보다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니, 이제 엄마 아빠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 아빠가 되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태명을 짓는 것부터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지 않는 일. 대신 먹고 싶은 것들을 열심히 챙겨 먹고, 부풀어 오르고 무거워질 몸의 변화를 인지하고, 알 수 없는 증상들을 겪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는 일. 이제 내 몸속에 심장이 두 개인 것을 기억하며 열 달이라는 시간의 박동을 격하게 감지하는 일. 그렇게 새로운 삶을 맞이할 각오를 하는 일까지.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괜히 한 번 배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모든 것이 말라 가는 계절 가을이 다가오고 있는데 내 뱃속에선 무언가 계속 움트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나에게 가을이 오는 걸까 봄이 오는 걸까 조금은 헷갈렸다. 나는 웃다가 울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