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있는 삶에 책과 고요와 쓰기

울타리를 치고 문을 달고 내 시름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by 임희정

우리 집은 산 바로 앞이라 거실에서 보이는 건 초록의 나무들뿐이다. 거실문을 활짝 열어놓고 식탁에 앉아있으면 들리는 건 새소리뿐. 그게 좋아 이사 온 집이었다. 남편과 나는 이 집의 전셋값 중 최소 1억은 이 ‘뷰 값’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 비싼 뷰를 맘껏 즐기기 위해 티브이 대신 6인용 긴 우드 슬랩 테이블을 놓고 벽 한쪽을 책장으로 채워 나름 서재처럼 거실을 꾸몄다. 그 테이블 위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글도 썼다. 가만히 앉아 생각도 하고 숲과 하늘 위에 얹어진 계절도 느끼며 살았다. 테이블은 나의 식탁이자 카페, 작업실이자 놀이터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였다.




출산 후 테이블 위엔 유축기가 놓였다. 그 위에서 커피도 마실 수 없었고, 책도 볼 수 없었고 당연히 글도 쓸 수 없었다. 이 위에서는 딱 두 가지만 할 수 있었다. ‘먹고 짜고’ 오직 밥 먹고 유축하고 밥 먹고 유축하고 반복할 뿐이었다. 테이블은 나의 식탁이자 거대한 유축기 받침대가 되었다. 내가 가장 슬퍼지는 나무였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던 6인용 우드 테이블은 이제 집에서 가장 걸리적거리는 물건이 되었다.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신생아를 키우는 공간 안에 혼자 너무 우아했다. 책장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 몇 달이 지나고 우드 슬랩 테이블은 결국 당근 마켓에 팔았고, 책장엔 책 대신 아이 용품들이 놓였다. 책장은 ‘아기장’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엔 새소리 대신 아이 울음소리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울려 퍼졌다.



테이블은 나의 식탁이자 카페, 작업실이자 놀이터였다.




주방 한쪽에 놓았던 커피머신 대신 젖병소독기가 놓였고, 신혼 때 샀던 드롱기 아이코나 빈티지 올리브 그린색 커피포트 대신 분유 포트가 놓였다. 밤에 잠이 안 올 때나 책을 볼 때 잠깐씩 켜 두었던 스탠드는 이제 새벽 어느 때라도 깨서 아이의 상태를 살펴야 했으므로 밤새 켜져 있었다.


남편과 함께 입으려고 산 체크 잠옷 대신 언제라도 가슴을 내놓을 수 있는 수유복을 입었고, 욕조가 없는 우리 집 화장실엔 거품용과 헹굼용 아이 욕조가 두 개가 생겼다. 수유 쿠션과 역류방지 쿠션, 짱구 베개, 좁쌀 이불, 처음 들어보는 온갖 침구 용품이 필요했고, 기저귀는 아무리 쌓아두어도 금세 없어졌으며, 젖병은 매번 닦아도 또 닦아야 했다. 차분한 뉴에이지나 멋진 재즈 음악, 힙한 팝송 대신, 타이니러브 모빌 음악 소리가 내내 울려 퍼졌다. 모두 아이를 위한 것. 아이만을 위한 모든 것이었다.


60센티도 안 되는 작은 생명체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집안의 많은 것들은 없어지거나 생겨났고, 나는 그것을 치우고 들여놓고 정리하느라 매일 정신이 없었다. 신혼 때 열심히 내 취향과 필요에 의해 정돈하고 가꾸었던 집 안의 풍경들은 야금야금 바뀌어 내 존재마저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았다. 아이를 낳은 후 닥쳐온 나의 성질과 모양과 상태가 달라지는 이 모든 변화가 당연한 걸 알면서도 한동안 나를 서글프게 했다. 나는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나인데,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달라졌고 달라져 나도 변해야 하는 걸까 두려웠다.






시간이 지나 나는 이제 테이블에 앉아 밥도 먹고, 아이 밥도 먹이고, 드물고 힘들지만 글도 쓰고 책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자라 통잠을 자게 되었고 단유를 했고 무엇보다 가슴에 가득 찼던 젖만큼이나 가슴속에 울분과 상념도 쌓였기 때문이다. 젖을 짜내던 유축의 밤이 생각을 꺼내는 쓰기의 밤이 되자 조금 살 것 같았다. 내 삶에 책과 고요와 쓰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6인용 테이블은 이제 2인용이 되었고, 그 위에서 밥을 먹고 먹이고 부지런히 그릇을 치우고 아이가 잠든 밤 겨우 독서대를 올려놓고 몇 장의 책을 읽다 몇 줄의 문장을 쓰고 지쳐 잠든다. 쓰고 싶은 욕구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자주 져버려 그마저 흔적을 남기지 못한 날들이 훨씬 많지만 말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란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엄마에게 글쓰기란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나는 지금 아주 괴롭고 고단한 그 일에 도전하고 있다.


나는 지금 아주 괴롭고 고단한 그 일에 도전하고 있다.



그저 욕심을 부리고 싶은 게 있다면 다시 6인용 테이블까지는 아니어도 식탁은 식탁으로 두고 책과 독서대와 노트북은 책과 독서대와 노트북으로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밥 먹을 때마다 독서대 바닥으로 내리고 노트북 치우지 않고 말이다. 쓰고 읽기 전 매번 무언가를 치우는 일이 먼저가 되지 않았으면. 그러니까 내 책상이, 글 쓰고 책 볼 수 있는 온전한 내 책상이 있었으면. 아니 내 방이, 완전히 고립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집 안에 집을 짓고 싶다. 울타리를 치고 문을 달고 내 시름 속으로 파고들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가 왜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지 이제야 절감한다. 수많은 글 쓰는 엄마 작가들이 식탁을 작업대 삼아 눌어붙은 밥풀과 굳어버린 김칫국물을 바라보며 썼겠지. 아이가 잠든 밤 피곤을 억누르고 손가락으로 꾹꾹 생각도 눌러가며 흔적을 남겼겠지. 이제야 엄마가 된 내가 시차를 둔 그 밤들에 뒤늦은 위로를 보내고 싶다.


누군가는 아이가 있는 삶에 책과 고요와 쓰기란 사치라 말한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지키는 삶은 욕심이라 말한다. 제대로 읽고 쓸 수 없어 괴로운 나에게 유별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버리려고 아이를 낳은 게 아니다. 아이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살고 싶다. 아이와 함께 ‘잘’ 살기 위해 읽고 쓰려는 것이다.


출산 후 많은 것들이 변했고 바뀌었고 어려워졌지만, 이 변화를 잘 받아들이며 나는 변하지 않기 위해 조금씩 읽고 쓰다 잠든다. 번거로워도 기꺼이 그릇을 치우고 독서대를 올리고 책을 편다.


엄마의 삶에 책과 고요와 쓰기를 위해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