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야 했던 엄마의 삶
엄마는 주부라는 직업을 제외하고 평생 다른 직업이 없었다. 직업 대신 부업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집 한켠에는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었고, 엄마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내가 학교에 갈 때도, 집에 와도, 밥을 먹어도, 심지어 잠이 들 때도 엄마는 쪼그려 앉아 똑같은 팔놀림을 하고 또 하고 계속했다. 좁디좁은 우리 집에는 그때의 나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부품들이 가득 쌓여있었고, 그것들은 내가 큰방에서 작은 방을 지나갈 때, 작은방에서 화장실을 향할 때 자꾸만 발에 차여 많이 따가웠다.
큰 포대자루 하나가 비워지면 엄마는 또 다른 포대자루를 열어 바닥에 쏟아냈고 똑같은 동작이 반복됐다. 엄마의 팔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속도만큼 돈이 됐기에 엄마는 화장실을 다녀오고도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않은 채 앉았고, 내 밥을 차려주고도 본인은 먹지 않고 앉았다. 팔이 저려올 때 허리가 뻐근할 때 한 번씩 집안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엄마 뭐해?”
“응. 부업해”
부업이 어떤 일인 지는 몰라도 적어도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것임을 어린 나는 일찍이 눈치챘다.
내가 커갈수록 엄마의 부담도 커져갔을 것이다. 아빠는 동트기 전 집을 나가 해가지면 집에 왔고,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을 했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뭐라도 해야 했다. 그 ‘뭐라도’에는 엄마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직업이라 불릴만한 일은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부업이 엄마의 직업이 됐을 것이다. 집안일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에겐 부업이었다.
나는 빈혈이 심해 앉았다 일어나면 머리가 항상 핑 돌았다.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나는 내 방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는데 순간 앞이 하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쿵하는 충격과 함께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있었고 왼쪽 턱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놀란 엄마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왼쪽 턱이 좀 찢어졌고 내 옆에는 엄마의 부업 부품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그 위로 쓰러졌고, 부품이 왼쪽 턱에 박혀 찢어진 것이었다.
엄마는 아직도 내 왼쪽 턱에 찢어진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다. 그때 찢어진 건 내 얼굴만이 아니었다.
“내가 그때 부업만 안 했어도 우리 딸 예쁜 얼굴에 상처가 없었을 텐데...”
내 상처는 엄마의 부업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찢어진 턱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어린 나는 엄마가 부품에 무언가를 끼는 것을 가만히 쪼그려 앉아 보고 있었고, 그러면 엄마는 나에게 “해볼 거야?”라고 물었다. 나는 “응!”이라 대답하고 그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엄마 옆에서 놀았다. 장난감 대신 부업거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 자식을 보며 그때의 엄마는 무슨 마음 이셨을까.
엄마가 하루 종일 부업을 해서 받은 돈은 겨우 몇만 원이었고, 아빠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해서 받은 돈도 겨우 몇만 원이었다. 왜 엄마와 아빠는 하루 종일 일을 하고도 ‘겨우’였을까.
아빠의 직업과 엄마의 부업이 지금의 나를 키웠는데 나는 그 직업과 부업이 참 서러웠다. 아빠는 매일 노동을 반복했고, 엄마는 계속 동작을 반복해 몇만 원을 받았는데 나는 그 몇만 원의 수당이 참 서글펐다.
뭐라도 해야 했던 엄마의 지난 시간들이 그저 애처롭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