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막노동... 까막눈 아빠가 남긴 '선명한 재산'
‘아빠는 소 같아.’
아빠를 마주하고 밥을 먹는 내내 속으로 내뱉었던 말이었다. 아빠는 밥을 참 많이 먹었다. 빼빼 마른 체격에 비해 항상 산처럼 쌓인 밥을 두 공기씩 먹었다. 숟가락 위에 뜬 밥도 항상 우뚝 솟아 있었고, 아무리 큰 총각김치도 절대 잘라먹는 법이 없었다. 보고 있으면 저게 과연 한 입에 다 들어갈까 싶어도 어느덧 입안에 털어내고, 이내 빈 숟가락으로 얼른 국을 떴다. 제대로 씹는 법도 없어 그 많은 밥과 반찬을 두세 번 만에 꿀꺽하고 삼켰다. 밥 한 공기를 먹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으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산처럼 쌓인 여물을 오물오물 삼키고 금세 밭으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일해야 할 소 같다고. 아빠가 항상 저렇게나 많이 그리고 빨리 밥을 먹는 건 배가 고파서 라기보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가족과 일의 양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아빠를 마주하고 밥을 먹을 때면 난 항상 목이 메어 물만 삼켰다.
아빠는 밥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밥 먹었냐”였고, 가끔 술 한 잔을 하고 전화를 할 때면 “밥 많이 먹었냐.”였다. 취한 정도만큼 밥 뒤에 ‘많이’가 붙었다. 어쩌면 밥을 잘 챙겨 먹는 것이 생의 목적이었을 아빠에겐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밥을 많이 많이 챙겨 먹었음에도 가장 무거웠던 몸무게는 56kg.아무리 많이 먹어도 노동의 양보다는 적었나 보다.
평생 직업은 막일. 그 일을 하며 온갖 땅에 수많은 집과 건물을 지었지만 그 어디에도 자기 집 한 채 갖지 못했다. 소유는 노동이 아닌 자본으로 가능했기에 가난했던 아빠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흔적 없는 공허한 노동만 반복했던 것일까? 아빠에게 땅은 그저 묻혀야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막된 물음만 떠올랐다. 그렇게 평생을 밭 대신 공사장을 일구며 열심히 소처럼 일했다.
그런 아빠의 일을 나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짐작하고 헤아렸다. 서류 가방 대신 나는 들 수도 없었던 망치와 톱, 못과 쇳덩어리 같은 무거운 연장이 가득했던 가방, 새 옷 대신 바래지고 낡은 작업복을 더 많이 사러 다녔던 모습, 집에 돌아와 그 작업복을 벗을 때면 널 부러진 옷가지 주변으로 퍼지던 쇳가루와 흙덩어리에서 충분히 그리고 깊게. 자연스럽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할 일 없으면 막노동이라도 해.”라며 막노동을 일의 막장으로 치부하는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그것은 아빠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나는 한글을 떼고 나서부터 철이 들었다. 내가 글을 쓰자, 아니 글자를 쓰자 아빠는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갈 때도, 축의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쓸 때도 나를 불렀다. 일십만 원과 아빠의 이름 석자. 7살 때 내가 가장 많이 쓴 글자였다. 6살 때는 5살 때는 그리고 4살 때에는 누가 써주었을까? 초등학교 입학 후 가정통신문 학부모 의견란에도 임대 아파트 입주 신청서에도 열심히 글자를 썼다. 한글을 잘 모르는 부모 아래 나는 최대한 일찍 한글을 떼야하는 자식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빠의 고희연을 위해 연회장 예약서에도 아빠의 이름 세 글자를 썼다.
자라나는 내내 서러웠다. 자기 이름 석자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 손이, 작고 마르고 구부정한 그 몸이, 여유와 편안이 없었던 그 마음이.
나는 서러웠고 아빠는 힘겨웠다.
사춘기도, 방황도 투정도 나에겐 허용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사달라고 조르는 것. 해달라고 칭얼대는 것. 아이의 언어. 청원의 말들. 사실 그것은 내가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모두 생략했다. 아이가 말보다 침묵을, 요구보다 인내를 먼저 배웠다. 어린 나이에 어리광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힘겨운 부모의 삶을 일찍이 이해해버린 일은 참 슬프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 활기찼고 때때로 우울했다. 그런 아빠를 자라는 동안 부정했고 다 자라고 나서야 인정했다. 서러운 만큼 부정하고 나니 어른이 됐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빠의 노동은 나를 정직하게 키워냈다. 바르게 살라는 훈계 한마디 없이 저절로 그 가르침을 배웠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나에겐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고 체득된 것이었다.
평생 첫차를 타고 출근했던 아빠의 시작을 따라 나도 일찍이 학교에 등교했고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 학교 가기 싫다는 투정한 번, 지각 한번 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개근상은 아빠의 상이다. 내가 본 것처럼 부지런히 회사를 출근했고 성실히 일했다. 아빠는 평생을 단 한 번도 요행을 바라거나 교만한 적 없었고,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쌓았다. 나는 그 우직한 삶이 너무 대단한 걸 알기에 감히 아빠라는 글자 뒤에 형용할 단어를 찾아내지 못한다. 아빠는 아빠다. 아빠의 직업으로는 삶을 사는 게 아닌, 살아내는 것이었다. 이제 안다.
이제 그 딸은 잘 자라 대학도 갔고, 돈도 벌고, 결혼도 했고, 아빠의 고희연 잔치도 해 드릴 생각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어렸을 땐 아빠의 태생이 학력이 직업이 생김새가 다인 것만 같았는데, 이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나 잘 자라난 것으로 아빠의 노동은 증명됐다.
나는 땅이나 돈 보다 더 선명한 아빠의 재산이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밥 많이 많이 먹었냐?”
밥을 묻는 것. 그 뒤에 ‘많이’를 붙이는 것. 아빠의 언어. 오늘은 ‘많이’가 두 번 붙었다. 짐작건대 ‘많이’ 한 번에 대략 소주 한 병. 오늘은 소주를 두 병쯤 드셨나 보다.
“네 아빠. 밥 많이 많이 먹었어요.”
“그래. 밥 많이 많이 많이 먹어라잉?”
아빠를 마주하고 밥을 먹은 것도 아닌데, 전화를 끊고 목이 메어 물 한 잔을 마셨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