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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Apr 05. 2019

자식보다 글이 나아서

부모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

‘언젠가 내 이름이 새겨진 책 한 권을 내 보리라!’ 막연하게 품었던 생각이었다. 종종 생각이 차오를 때 글을 쓰곤 했지만 맥락 없는 끄적임이었고, 부족한 표현이었다. 완성된 문장이라기보다는 흩뿌려진 감정들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었다. 유일한 독자는 바로 나.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지웠다.      


나의 부모는 아마도 단 한 권의 책도 생을 통틀어 읽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것은 의도한 것도, 그런 의지가 있던 것도 아닌, 마치 내가 단 한 번도 불어를 배워본 적이 없어 불어로 된 책을 읽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부모의 삶에는 읽고 쓰는 일 보다, 노동하고 버티는 일이 가득했다.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응시하고 사유하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고 반복해야 했다. 때문에 어린 자녀에게도 책을 사줘야 한다는 생각도 시도도 하지 못했다. 내 방에 책은 교과서 외에는 없었다.     


나의 첫 책은 초등학교 3학년 즈음. 고모가 생일 선물로 사다준 것이었다. 이것이 책이구나. 이것이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이구나. 태어나 10년 만에 처음 잡아본 그 책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그 한 권의 책은 내가 가장 집중하고 몰입했던 세계였다.      


중학교 때는 시를 썼다.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시가 뭔지도 몰랐는데 공책을 펴 놓고 ‘시’라는 것을 적었다. 주로 사랑에 관한 시가 많았다. 중학생이 사랑에 대해 뭘 안다고, 사춘기가 써줬다고 생각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일찍이 버려져 펴볼 수도 없지만, 그때의 나는 어린 시인이었고 그 공책은 나의 첫 시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일찍이 글을 쓰는 일은 내가 수줍게 좋아했던 일인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모의 이야기가 저절로 써졌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볼 때면, 아빠의 뒷모습을 볼 때면, 감정이 차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망의 글도 미움의 글도 많았지만 부모와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회한의 글과 관망의 글이 많아졌다. 한 발짝 물러서 시간을 두고 사유한 생각들은 깊다. 제풀로 글이 된다. 얼굴 앞에서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던 말들이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 앞에서, 하얀 종이 위에서, 곰살궂은 글자와 다정한 문장이 되었다. 써 내려가며 참 많이도 감읍했다.      


부모는 나보다 글로 먼저 인정받았다. 글이 부모를 인정해 줬다. 항상 죄송스럽다. 자식보다 글이 나아서. 꼭 지나가고 나서야 곱씹고 반성하게 되니 문제다. 글을 먼저 써야 하나? 나는 글로 효도를 한다.     


부끄럽지만 10대에는 친구들의 부모보다 초라해 보였던 나의 부모를 원망했고, 20대에는 나 혼자 잘나서 자란 줄 알고 내 멋대로 살고 싶어 부모가 거추장스러웠다. 30대가 되고 나서야 이제 겨우 내 부모의 희생과 사랑 그 의미를 조금씩 알게 됐다.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시간이 지나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어떻게 될까? 어느 순간 부모가 정말 없는 순간도 오겠지? 상상만으로도 무너진다. 한때 철없는 못난 마음으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모가 진짜 없다면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일 일 것만 같다. 나는 부모의 부재를 겪고 살아가는 자식들이 대단하다. 그것은 또 다른 곤란이고 통증이고 슬픔일 듯하다.     


내가 쓸 수 있는 사람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쌓여있는 울화를, 말 못 한 감정을, 전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풀어놓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글 한편이 잘 써지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적절한 비유와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하루 종일 체한 것 같다. 내 글이 답답하다. 어쨌든 쓰기 위해 곤두서 있는 내가 나쁘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에게 쓰는 일을 강요하고 싶다. 마음 쓰기. 그 어떤 약보다 그 어떤 방법보다 가장 정확한 치료 방법이 아닐까. 글을, 마음을, 써보라 권하고 싶다.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점은 내 감정이 정의된 것과 내 삶이 정리된 것. 그리고 나의 생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 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기는 것 같다. 쓰기 전보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된 것 같고, 쓰고 나서는 조금 더 잘 살아지게 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마음의 둘레가 넓어진다.    

 

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기는 것 같다.


내가 쓰는 부와 모의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어 특별한 이야기다. 대단할 것 없어 대단한 이야기고, 지난하고 무던한 사담이다. 나는 그 사사로운 나의 부모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인걸 알아 쓰고 또 쓴다. 읽고 또 읽고 퇴고하고 편집하며 다듬고 또 다듬는다. 그러다 보면 평범한 이야기는 비범한 한 편의 글이 된다. 쓰고 나면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정말 위대한 일상을 살아왔구나 느껴진다. 어떤 것이든 매일의 노동을 수 십 년간 반복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부모의 삶이 흔적이 되어 모두에게 읽히면 다들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라 믿는다.     


누구나의 이야기지만 누구나 쓰지 못한 이야기. 하지만 누군가는 자취를 남겨야 할 이야기. 바로 노동자의 삶과 부모의 일생이다. 가슴에 응어리져 있어 풀어내려고 쓰기 시작했던 글은 사명감도 의무감도 생겼고 무엇보다 독자가 생겼다. 감사하고 벅찬 일이다.     


글로 효를 실천하는 건 참 모자란 효도지만 적어도 쓰고 읽는 동안에라도 효녀가 되고자 한다. 읽는 모두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싶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는 순간이었으면 한다. 내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쓰며 겨우 효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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