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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r 29. 2019

나에게 필요했던 부모의 품

혼자는 익숙하지만 서러운 건 익숙해지지 않아

스물여덟. 광주 MBC에 합격했다. 그 전에도 방송 경력은 있었지만 드디어 공중파 입성! 이제 진짜 아나운서가 된 것 같아 너무 기뻤다. 하지만 꿈을 이룬 기쁨과 동시에 이제부터 혼자 타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좁은 집, 그보다 더 좁았던 나의 마음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난 후 매일 독립을 꿈꿨는데 갑작스럽게 자의가 아닌 타의로, 서울이 아닌 전라도 광주에서 혼자 살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나는 독립의 꿈을 이룬 기쁨보다, 갑자기 떨어지게 된 부모와의 생활이 허망했다.


합격 통보를 받고 바로 그다음 주부터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급하게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내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영원히 못 볼 것도 아니지만 이제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눈물은 날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부모였지만 그들은 나의 부모였기에 멀어지는 거리로도 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아휴... 우리 딸 아쉬워서 어뜩해... 이제 진짜 혼자 살아야 하네...’


“잘 가라.”     


엄마의 혼잣말과 아빠의 한마디, 그 말들을 뒤로하고 차에 올랐다. 차문을 닫고 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나에게 독립은 이제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건 어렸을 적 일찍이 했던 것이었고, 나에게 독립은 부모로부터 내가 나가는 것이 아닌, 내 속에 있던 부모를 떼어놓는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사이드미러를 보는데 돌아서는 아빠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와르르 무너졌다. 광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행여나 해외 취업이 됐다면 나는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열여덟도 아니고 스물여덟의 다 큰 딸이 독립을 한다는 건 사실 울 일도 아닌데, 그때의 부모님은 딸에게 아무것도 손에 쥐어주지 못하고 내려 보내는 마음에 눈물이 났을 것이고, 나는 나에게 의지하며 사는 부모가 이제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누가 누구에게 독립을 하는 건지. 그렇게 광주로 내려가는 트럭 안에서 참 많이도 서럽게 울었다.      



서른하나. 제주 MBC로 이직을 하게 되어 제주도에서 혼자 두 번째 타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번에는 섬이다. 문득 나의 역마살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광주에서 2년 동안 지내며 타지 생활에 적응도 됐고, 처음 내려올 때 부모님을 보고 흘렸던 눈물이 무색해질 정도로 혼자 지내는 삶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또다시 그것도 섬에서 혼자 살아야 할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해지기도 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제주도에 사니 좋겠다며 부러워했지만 삶은 여행과 다르다. 나는 제주라는 섬에서 혼자 ‘살아야’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제주 살이 역시나 너무나 좋았지만 가끔 창밖을 보며 이 길을 따라 걸어 나가면 저 앞엔 더 이상의 땅이 없다는 사실이, 내 눈앞에 보이는 선이 지평선이 아닌 수평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섬에서 혼자 살고 있구나. 문득문득 외로워지기도 했다.      


어쨌든 문제는 이사였다. 짐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적은 것도 아니었기에 육지에서 육지가 아닌,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이사는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차도 있었고, 짐도 있었고, 바다를 건너지 못한 마음도 있었다. 이삿짐센터를 알아보니 100만 원 가까이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큰 짐들은 우체국에 부치고 남은 생필품들은 차에 가득 밀어 넣었다. 냄비와 국자부터 선풍기까지 물건들을 가득 밀어 넣은 내 차는 사이드미러도 백미러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차를 끌고 광주에서 완도로 겨우겨우 운전을 하고, 완도 선착장에서 배에 차를 실었다. 그제야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던지 나는 배가 고파 선착장 앞 식당에 들어가 오후 1시에 아침을 먹었다. 백반을 시키니 진짜 12첩 반상이 눈앞에 차려졌다. 심호흡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이고! 어린 처자가 혼자 어딜 가나?”

“제주도로 이사 가요.”

“혼자서? 아이고 밥 많이 먹어요. 모자라면 더 줄게!”

“네. 감사합니다.”     


까만 쌀밥을 숟가락으로 뜨고, 조기를 한 점 젓가락으로 떼어내 올리고, 미역무침도 집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왜 이 모든 걸 혼자 하고 있는가.’ 너무너무 서러웠다. 아빠는 지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혼자 차 탈 줄을 모른다. 아빠의 하루치 일당은 딸의 이사보다 중요한 걸까. 엄마의 어른스럽지 못한 자립심은 자식보다 못난 걸까. 밥상 앞에서 한참동안 씹지 못하고 원망했다. 나는 광주에서 제주까지 이삿짐을 싸고, 차에 싣고, 배에 선착해, 원룸을 알아보는 일까지 죄다 모두 혼자 해야만 했다.      


혼자 하는 건 아무래도 익숙했지만 서러운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리고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제주도로 내려가는 배 안에서 나는 2년 전 그때처럼 참 많이도 서럽게 울었다. 엄마는 나에게 많이 미안해했다. 제주도로 혼자 이사해야 하는 딸에게 엄마가 가겠다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얘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이삿짐을 싸고, 짐을 풀고, 방바닥을 닦고, 그릇을 정리하고, 따뜻한 밥상까지 차려냈을 엄마다. 그걸 알아서. 엄마가 혼자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걸 알아서. 나는 엄마에게 도와 달라고, 내려와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식을 두 번이나 타지로 보내며 돈도 쥐어주지 못하고 가보지도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꾸역꾸역 혼자 육지에서 짐을 싸고 섬에서 마음을 풀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광주와 제주에서 혼자 원룸에 앉아 짐을 풀 때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누군가가 나의 엄마 혹은 아빠였으면 하고 바랐다. 사실 나는 도움보다 모든 걸 혼자서 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부모의 품에 기대어 의지해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혼자서 잘도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시간이 지나도 자식은 자식이기에 부모의 손길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엄마의 품과 아빠의 맘은 다 커버린 자식에게도 불쑥불쑥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부모가 있었지만 부모가 필요했다. 혼자는 익숙했지만 서러운 건 끝까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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