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생각할 무렵
제주MBC 재직 시절. 제주에서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당직근무가 없는 날 육지에 올라왔다. 광주에 있을 때는 기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느라 선로 위에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제주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하늘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그 돈 안 뿌리고 차곡차곡 모았다면 학자금 대출 일찍 갚았을 텐데 싶다. 어쨌든 기차 탈 때는 큰 가방 하나면 됐는데, 이상하게 제주도에 살아 그런가? 비행기를 타서 그런가? 고작 이틀 주말 있다 내려올 건데 제주에서 육지 갈 때는 꼭 캐리어를 끌고 왔다. 나는 그 가방과 캐리어에 각종 김치와 반찬을 담아 일요일마다 내려오곤 했다.
일요일. 어김없이 다시 제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오면 아빠는 항상 내 캐리어 가방부터 챙겼다. 짐을 다 쌌냐 물어보고, 다 쌌다고 하면 얼른 캐리어를 들고 문을 나섰다. 공항버스 정류소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가는 길. 빼빼 마른 아빠는 무게가 꽤 나가는 가방을 굳이 자기가 끝까지 들겠다며 손에서 절대 놓지 않으셨고, 더위를 많이 타는 엄마는 여름이면 더운 날씨에 이마와 손에 땀이 송글 송글 맺혀 있는데도 굳이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는 나의 짐을 아빠에게 쥐어준 채 주름진 엄마 손을 잡고 호강하며 걸어갔다. 누가 보면 어디 멀리 외국에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겠네. 그래 봤자 국내선이면서. 청승맞다. 버스정류장에서 행여나 공항버스가 지나갔을까, 비행기 시간 놓칠까,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고개를 쭉 빼고 저 멀리서 오는 버스만 쳐다보는 아빠. 지금 보내고 나면 한 달 후에 볼 딸의 얼굴이 그리워 나만 쳐다보는 엄마. 그런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는 나. 그 순간 우리 가족의 모습은 그 정류소에서 가장 애틋하고 따뜻했다.
광주에 있을 때는 주로 KTX를 타고 다녔는데, 한 번은 이런저런 짐이 좀 있어 부모님께서 기차 안까지 들어와 짐을 올려 주셨다. 됐다고 됐다고 얘기를 해도 아빠는 꼭 자기가 그 가방을 올려주고 가야 한다며 엄마와 함께 열차 안으로 기어코 들어오셨다. 짐을 올리고 이제 얼른 내리시라고 손짓을 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기차가 출발해 버렸다. “오매! 어찌하쓰까! 오매! 오매!” 놀란 엄마는 승무원 대신 ‘오매’ 만 찾았다. KTX는 하필이면 정확하게 정시 출발이다. 결국 아빠와 엄마는 다음 역인 천안아산역에 내려 광명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날 우리 가족의 모습은 그 열차 안에서 가장 바보 같고 시끄러웠다.
엄마 아빠의 배웅을 받고 공항버스를 타고 기차를 탈 때면 난 항상 청승맞게 눈물을 흘렸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뒤에 다시 또 올라온 건데 처량하게 그렇게 눈물이 났다. 차에 타기 전 끝까지 뭐라도 하나 더 해주고 싶고, 만지고 싶고, 보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버스와 기차가 떠난 한참 후에도 나는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끝까지 창문을 향해 흔들던 작고 주름진 손, 번쩍 들어 올려 있었던 두 팔, 뒤돌아 땅을 보고 걸어가셨던 부모님의 뒷모습까지 모두 애처로웠다. 인사는 왜 하필 두 팔을 만세 하듯 번쩍 다 들고 끝까지 손을 흔드는 건지. 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에게 진짜 진짜 잘 가라고, 정말 정말 잘 가라고, 손 짓만큼 계속 계속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기 전날 밤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딸 가고 나면 엄마는 허전해서 딸 방에서 자.”
이제 딸은 없고 딸 방만 있는 우리 집.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거실에 나가보지도 않고 맨날 자기 방에서 콕 박혀 있었던 딸. 같이 살 때나 같이 안 살 때나 집에서 딸을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함께 살 때는 작은 방 문을 열면 내가 있었는데, 이제 문을 열어도 내가 없는 내 방. 엄마는 그 방문을 열어보며 책상에 앉아 있던 딸을,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떠올리실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허전한 우리 집. 그보다 더 허한 부모의 마음.
엄마는 오늘 밤 내 방에서 주무시며 지금의 나처럼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실까. 지금 우리 가족의 모습은 각자의 집에서 가장 허전하고 애틋하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많이 생각할 무렵. 사랑 그즈음. 조금은 청승맞은. 그럴 무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