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씻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쌀을 씻다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어휴... 지겨워.”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 엄마가 차려낸 평생의 밥상은 몇 번일까?
결혼 1년 차 새댁은 이제 겨우 열두 달도 채 차려내지 못한 밥상을 벌써부터 지겨워한다. 삼시 세끼 밥을 해 먹는 것이, 끼니를 챙기는 것이 이렇게나 위대한 일이었다니 겨우 이제야 안다.
어렸을 적 평생을 가정주부로 산 엄마를 보며 답답하다 생각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고, 핸드백을 들고 외출하는 세련된 친구들의 엄마를 항상 부러워했다. 우리 엄마는 얼굴에 화장 대신 삶을 발랐고,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 대신 뒤꿈치가 접힌 낡은 운동화를 신었고, 핸드백 대신 장바구니를 들고 다녔다. 촌스러웠고 무지했고 일의 범위는 항상 집 안에 있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자식을 학교 보내고 청소하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평생 그 일을 반복하셨다. “밥 먹었어?” 그 한마디를 묻고 차리고 묻고 차리고, 아침 이른 시간에도 늦은 저녁 시간에도 가족 중 누군가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바로 차려냈다.
나는 직장 때문에 이십 대 후반부터 타지 생활을 5년 동안 했다. 한 달에 한 두 번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막차를 타고 올라오면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러면 엄마는 오후 한 시처럼 문을 열고 나를 반겨주었고 어디 이민을 간 것도 아닌데 한 달 만에 보는 딸이 그렇게나 반가운지, 자기의 가슴과 내 가슴이 맞닿아 짓눌릴 만큼의 깊은 포옹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물었다.
“우리 딸 밥 먹었어?”
“배고파...”
새벽 한 시.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고요한 새벽의 밥상 앞에서 한 달 사이에 더 늙어버린 엄마 얼굴을 보며 난 애써 엄마의 얼굴이 좋아졌다 말하고, 한 달 사이에 더 말라버린 딸의 얼굴을 보며 엄만 안쓰럽다 말한다. 엄마는 가끔 나를 보며 조용히 내뱉었다.
‘어휴. 우리 딸 안쓰러워...’
주어를 엄마로 바꾸어 내가 내뱉어야 할 말이, 그렇게 나지막이 들려올 때면 참 속상했다.
밥을 먹고 내 방에 들어가면 항상 집에서 입던,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가 말끔한 수트처럼 개어져 침대 위에 놓여있다. 흩트려 입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러면 엄마는 장롱 문을 열고 우리 집에서 제일 비싸고 푹신한 이불을 한가득 들고 들어온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본 딸내미에게 이것저것 할 얘기도 많을 텐데, 피곤할 테니 어서 자라며 급히 불을 끄고 나가신다. 그렇게 새벽 두 시. 나는 감읍하며 잠이 들었다.
항상 타지에서 혼자 사는 딸을 위해 각종 김치와 반찬을 싸 보내셨고, 나누는 통화의 시작과 끝은 “밥 먹었어?”와 “밥 챙겨 먹어!”였다. 나는 그렇게 타지에서도 엄마의 밥을 먹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배움이 짧았던 탓에, 엄마가 선택한 본인의 최선은 뒷바라지였다. 그렇게 매일 쌀을 씻었고, 돈을 아꼈고, 조용히 가정과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았다. 평생 습관이 안 된 탓에 만원 한 장 가볍게 내민 적이 없었고, 자신을 위해 먹거나 치장하거나 선택하거나 누리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 있든, 딸에게 자기 손으로 밥을 해 먹어야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 생각하며 평생 매일 쌀을 씻었다.
결혼을 해보니 이제 그 딸은 쌀을 씻다가도,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할 때도, 빨래를 하다가도,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직장에 출근하다가도 문득문득 엄마가 떠오른다. 반복되는 일상의 행위들을, 집안에 한정되어 있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존중받지 못했던 일들을, 엄마라는 이름 아래 지워져야 했던 그 수많은 가사들을, 사사롭다 생각하고 당연하다 생각했던 내가 한없이 후회스럽고 죄송스럽다. 무지한 건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그렇게 엄마가 차려낸 평생의 밥상은 정말 과연 몇 번일까? 한 끼 두 끼, 일 년 이년. 손가락으로 대충 세어보아도, 혹 내가 앞으로 엄마의 남은 여생 동안 매일 차려 드린다 해도, 엄마가 지금껏 차려낸 것보다도 훨씬 모자랄 횟수다.
쌀을 씻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