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요즘 나는 매주 수요일 저녁 ‘시’ 수업을 듣는다. 남편은 말했다. 이제 시인이 될 거냐고. 나는 말했다. 나는 미인보다 시인이 되고 싶다고. (둘 다 못될 것 같다) 시 수업을 듣는다고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시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시인이 못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며 한 번쯤은 머릿속 생각으로든, 휴대폰 메모장에든, 빈 문서 속 궁서체로든, 한 줄 정도의 시는 넓혀보지 않았나. 하지만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메모를 황급히 삭제하며, 빈 문서를 저장할까요?라는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그 흔적을 지워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나는 많다. 너무나 많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썼다. 공책 한가득 사춘기가 써준 부끄러운 시들이 가득했다. 성인이 되어 글을 쓰다가도 긴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다른 글을 쓰고 싶어 질 때, 감정이 과잉일 때, 나는 시를 건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부풀어 오른 시에 대한 마음을 날카롭게 잘 건드려서 빵 하고 터트리길 바랬는데, 그 터지는 소리가 무서워 풍선 끝을 가위로 조금 잘라 피육 하고 맥없이 바람을 뺐다. 그렇게 나의 시는 공기 중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지우고, 버리고, 써 놓고도 쓰지 않은 것처럼. 마치 어린아이가 남의 집 초인종 벨을 누르고 도망치듯 나는 다시 글로 도주했다.
생에 있어 무언가를 저질렀던 순간들은 내가 그것에 대해 마음은 있는데 가장 무지할 때였다. 간단히 줄이면 ‘무식해서 용감하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시 수업을 등록했다. 마음은 있는데 지혜나 꾀가 없어 어떻게 서든 비벼보려고. 뭐라도 들으면 한편이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하지만 선생님은 첫 시간에 말했다. “나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할 수 없어요.” 예상했지만 이렇게 시작과 동시에 선언하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스무 살 막내 시인은(학인들을 다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고등학생 때 입시로 시를 썼다고 했다. 맞춰야 할 형식이 있었고 써야 할 구성이 있었다고. 그렇게 시 전공으로 대학에 왔는데 교수님들이 계속 자유롭게 쓰라고만 하니 더 어렵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수업에 왔다고 한다. 20년 인생의 위기. 그러면서 수줍게 “저는 낡은 것들이 낡았다 생각하지 않아요. 고유하다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맞아. 그녀가 스무 살의 고유한 시들을 많이 써 주길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이름이 90년대 아주 유명했던 한 가수와 똑같은, 그래서 시인인데 가수 이름으로 먼저 떠올리게 되는 남자 시인은 자기는 10년 동안 시를 썼는데 시가 뭔지 모르겠어서 왔다고 했다. 20년, 30년, 40년을 쓴다고 알게 될까. 우리는 모두 시 앞에서 무지하다.
짧은 몇몇 분들의 자기소개 후 선생님은 말했다. “새로운 것들은 헌것들의 스승이잖아요. 저는 여러 권의 시집을 냈지만, 오히려 수강생들에게 배울 게 많아요. 몸이 굳어 애써 유연해 지려 합니다.”
나도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깊게 공감했다. 헐고 굳어버린 내가 수업을 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배우고 배워, 쓰는 영역의 요기 다니엘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내리는 눈을 보며 물었어요. 눈이 왜 내리냐? 아버지는 이런 대답을 기대하시고 여쭤 보신 거였죠. 아버지. 눈이라는 것은 대기 중 구름으로부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얼음의 결정으로써... 하지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버지.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나립니다.”
그날 선생님의 아버지는 어머님께 노발대발하며 저 자식을 호적에서 파라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버님 혹시 그거 아시나요. 한 포털사이트 지식백과에 ‘눈’을 검색하면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기상 현상’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는 걸.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수업이 끝난 후 단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겠다. 이런 자기소개와 이런 표현과 이런 일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내가 시를 쓰기 위해 해야 할 것은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애써 기억하고 힘써 기록해야 하는 것임을 다짐했다.
가끔 시집을 읽을 때 종이 한 모퉁이를 세모나게 접게 되는 시에는 어김없이 가난이 있었다. 어머니가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다. 한 시절이 있었고, 고루한 그러나 위대한 일상이 있었다. 그런 시들 앞에서는 꼭 멈춰서 소리 내어 읽어봤고,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어 마음속에 접어놨다. 나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제일 많이 생각한 것들이라 이제 그만 생각하고 싶었는데,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첫 시간 수업 과제로 시 한 편을 썼는데, 부러 가난과 부모가 없는 시를 쓰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나는 시 속에서도 엄마와 아빠를, 그 시절의 가난을 쓰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스스로 모자람의 흑역사를 남겨본다. 처음으로 빈 문서에 제목을 달아 저장 안 함 대신 저장을 눌러 자국을 남긴 나의 공적인 첫 시. 그 시 앞에서 나는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이 조금 좋아지기도 한다.
무지한 내가 시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운문이 푹푹 나린다.
찢어진 단칸방
임희정
철 대문을 열면 단칸방 네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엄마는 연탄가스를 마셨고
아빠는 불같은 성질을 못 이겨 밥그릇을 던졌고
나는 내복만 입은 채로 울며 엄마에게 맞았다
다 가난이었다.
거실, 식탁, 샤워라는 단어를 몰랐다
방, 밥상, 목욕만 알았다
엄마는 목욕탕에서 발을 헛디뎌 머리가 찢어졌다
빨간 물 열탕에서 때를 불리고
빨간 물 냉탕에서 팔을 휘젓는 아줌마들에겐 상관이 없었다
알몸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안 찢어졌으면 니 엄마 죽었어
수건을 찢고
봉지를 찢고
귀청을 찢고
살을 찢고 엄마가 살았다
아 나도 엄마의 자궁을 찢고 살았지
그렇게 살았는데
그렇게 살고 있는데
지긋지긋하다고 엄마는 소리쳤다
머리가 찢어지지 말았어야 했나
자궁을 찢지 말았어야 했나
죽었어야 했나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지긋지긋의 지읏과 기역이 반복될 때마다
모두가 지겨워졌다
하나 둘 셋 넷
단칸방 네 집이 있었다
하루는 첫 번째 집에서
하루는 두 번째 우리 집에서
다음날은 세 번째 집에서
윽박과 악이 울려 퍼졌다
딱 단칸방만큼의 찢어질 듯한 가난이
집집마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