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행을 가고 싶어, 비행기를 타는 대신 여행기를 쓴다.
[런던 여행기를 굳이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행을 다녀온 지 3개월이 지났는데, 다시 런던이 가고 싶어, 여행을 가고 싶어, 비행기를 타는 대신 여행기를 쓴다.]
혼자 하는 여행에 집착하며 살았다. 딸려있는 자식과 맡고 있는 중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얹혀있는 걱정과 이고 지고 있는 고뇌가 많아 어딘가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삶의 일시정지와 잠깐 멈춤이 떠남과 동시에 영원해지면 어쩌나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 번씩 ‘혼자’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러면 괜찮아졌다. 일상에 치였다가 여행을 다녀오면 다시 잘 살아 볼 용기가 생겼다. 낯선 곳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익숙한 배경에서는 항상 내가 떠안아야 할 무언가가 먼저 보였다. 처음 보는 경치에서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상과 감탄이 제일 앞에 놓였다. 그게 좋아 집착했다. 카드를 긁고 무모하게 떠났고, 매여있고 싶지 않아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멈칫할 이유가 생겼다. 남편. 혼자 런던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혼자? 신랑은? 이라며 반문했다. 내가 여행을 간다는데 왜 신랑을 묻지. 나는 대답 대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가면 안돼?”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쉽게 되는 것도 아닌 듯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와 바빠지지도 않은 일에 대비해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혼자’에 당위를 붙였다. 신랑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게 떠나온 런던이었다. 뭘 해도 좋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 알아들을 수 없는 행인들의 말소리와 처음 발 딛는 곳 들이면 충분했다. 아니 ‘런던’이라 족했다.
뮤지컬 라이언킹을 보았다. 막이 오르자 ‘아~ 그랬냐! 발발이 치와와~’하는데 갑자기 혼자 벅차서 막 눈물이 났다. 무대장치며 분장, 배우들 노래 등등 보는 내내 모든 게 다 환상적이고 완벽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온전히 행복해서. 중간에 미어캣 티몬이 ‘하쿠나 마타타 민스 노 워리!’하고 관객 모두에게 크게 외치는데, 마치 내 귓속에는 ‘희정! 하쿠나 마타타!’하고 주어를 붙여준 것 같았다. 다들 손뼉 치며 신나 하는데 또 혼자 울었다. 라이언 킹왕짱! 하며 혼자 엄지 척을 했던 밤이었다.
비틀스의 상징 애비로드를 갔다. 그냥 횡단보도인데,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이 횡단보도를 목숨 걸고 건너며 사진을 찍었다. 최대한 보폭을 넓히고 손을 휘두르며 비틀스처럼. 비틀스의 앨범을 들으며 건너가는 미국 사람, 중국사람, 독일 사람을 보고 있는데 또 눈물이 났다. 고스란히 행복해서.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Let it be가 흘러나오자 나를 위해 비틀스가 횡단보도 앞에서 단독 공연을 해 주는 것 같았다. 빵빵. 경적소리마저 리듬을 타주는 것 같았다.
다운트북스 서점에 갔다. 론니플래닛에서 꼽은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1912년에 문을 연 백 년이 넘은 서점이라고 한다. 들어서니 과연 그랬다. 천정이 높고 채광이 좋아서 책들이 다 따뜻해 보였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작가가 되려고 런던에서도 서점을 이리 찾아다니나. 하긴 내가 좋은 작가가 될 확률보다 서점 알바생이 될 확률이 더 큰가. 알바생보다 작가 생이 되기 위해 런던에서도 썼다.
런던에서도 이렇게 충만했는데, 에든버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대했던 곳이었다. 기차를 타고 그지없이 초록색인 창문을 바라보며 ‘스코틀랜드’라 발음해 봤다. ‘틀’의 파열음이 마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이미 런던에서 다 터져버렸는데 더 터질 마음이 있나. 하긴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으니까. 자고로 여행지에서는 두 발로 걷는 게 아니라 둥둥 떠다니는 것 아니겠나. 기차가 멈추고 에든버러에 도착하자 마음과 함께 가슴도 터질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안 봤는데 무조건 좋았다. 나에게 에든버러는 그런 곳이었다. 분위기가, 상태가, 공기가, 이 도시가 조건이 없었다.
유네스코에서 문학의 도시로 처음 등재된 도시. 셜록홈스의 작가 코난 도일부터 해리포터 조앤 롤링도 여기에서 글을 썼다. 그렇다면 내가 쓴 글도? 글은 장소 빨로 써지는 것만은 아닐 테다. 하루는 아침 일찍 칼튼 힐 언덕에 올라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언덕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 이 풍경을 보고 있는데, 뭔가 내가 다른 관광객들보다 한 발 앞서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내 앞에서 에어 팟을 끼고 러닝을 하며 온화한 미소로 뛰어가는 게 아닌가. 싸우지도 않았지만 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풍경을 보려고 12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데 당신은 매일 아침 봅니까? 위너는 달리는 자였다.
생이 항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래서 남는 게 없어도 쌓이지 않아도 미련이 없었다. 어차피 새어 나가고, 당연히 채워지지 않을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었다. 욕망과 희망을. 돌아가면 또 카드빚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나는 여태껏 그래 왔듯이 빚으로 동력을 얻었다. 내 사정과 여유에 맞추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으니까.
이번 여행도 잘 질렀다. 혼자 여행을 허락해 준 남편에게 고맙고 혼자 여행을 또 잘한 나에게 고맙다. 본 것들 느낀 것들을 활자에 녹여내며 계속 살고 싶다. 잘 노력해 볼 것이다. 런던과 에든버러 곳곳을 다닐 때마다 쓰는 삶에 대해 기도했다. 가 닿을 것이다. 많이 골몰하고 쓸 것이다.
다시 내 방에서 노트북 위에 열 손가락을 얹어 본다. 활자로 두 번째 런던 여행을 떠나본다. 이렇게 또 한 편의 글이 완성됐다. 가끔 이렇게 과거 행복했던 여행을 복기하며 비행기를 타는 대신 여행기를 써야지. 글자를 타고 어딘가에 도착한 나를, 무언가에 깊게 감응한 나를 기쁘게 써내려 갈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또 하나의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