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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Nov 15. 2019

아나운서에서 작가로 이동하는 중

말보다 글이 먼저가 되었다.

아나운서에서 작가가 되자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 있었다. 말보다 글이 앞에 놓이게 되면서 오는 마음과 생각의 움직임들. 나는 그 이동이 좋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방향으로 내가 흘러가길 바란다.     

 

아나운서 준비생들을 가르치며 내가 자주 내뱉었던 말이 있었다. 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읽는 사람이 아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쓰는 사람이 아닌 ‘잘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쓰는 이 한 줄의 문장은 지면과 플랫폼 어딘가에 내 생각을 박제하는 일이므로 신중해야 하고 적절해야 한다고. 종이 한 장은 아주 가벼운 것이지만, 그 안의 활자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잘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찌푸리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자책하고, 지우고, 다시 쓴다. 이것은 모두 내가 자처한 일이다. 내가 마음먹은 일이다. 그러니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반복하기로 한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반복하기로 한다.



말 앞에서는 즉흥 애드리브도, 상황을 아우르는 적절한 멘트도 자신 있었다. 10년 가까이를 해 온 일이니까 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글 앞에서는 아무리 반복하고 애를 써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깜빡이는 빈 문서의 커서 앞에서 자주 멈춰있었다. 정리되지 않는 짓눌린 생각들, 내가 아는 어휘는 생각의 크기에 비해 항상 모자라고, 표현해도 부족한 실력을 매번 확인하며 자책하는 나날들이 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과 번거로움이 좋다. 더 알맞은 단어를 고르려는 까다로움, 더 온전한 문장을 완성하려는 욕심은 예외없이 더 좋은 글로 보상이 되었다. 살은 먹는 만큼 찌고, 글은 퇴고하는 만큼 말쑥해 진다.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 이태준







뉴스를 진행하러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 최소 2시간 정도의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세수를 하고 메이크업 베이스부터 속눈썹을 붙이는 일, 머리를 세팅하고 스프레이로 단단히 고정하는 일, 보도국에서 오늘의 뉴스 원고를 가져와 예독을 하고 모르는 단어나 설명을 찾아보는 일, 복식호흡과 발성 연습을 하며 발음 연습을 하는 일, 정장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일, 스튜디오에 앉아 프롬프터 카메라를 확인하고 마이크와 이니어를 착용하는 일이 끝나면 오늘의 뉴스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것은 준비시간을 포함해 3시간이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늘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 3시간에서 3일, 혹은 3주가 지나도 마무리되지 못한 글들은 언제나 노트북 바탕화면에 제목 없이 놓여있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첫 문장은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지 못해 자주 삭제되었고, 신내림 같은 글내림으로 미친 듯이 생각을 토해낸 글은 마무리되지 못해 임시저장되었고, 새벽 감성으로 써 내려간 감정과잉의 토사물 같은 몇 줄은 다음날 맑은 정신에 의해 휴지통으로 버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언제나 두려우면서도 용기를 내었던 곳은 ‘빈 문서 1’의 깜빡이는 커서 앞이었다.  

    

말과 글의 우선순위가 바뀌니 질문과 답의 순서도 바뀌었다. 방송 진행을 하며 항상 수많은 패널들에게 해야 할 질문을 고민하다, 책을 내고 독자, 기자와 누군가의 질문으로부터 답을 해야 할 위치가 되었다. 질문은 상대방의 말속에서 찾았지만, 답은 내 안에서 찾아야 했다. 질문은 왜요? 한마디로도 자주 끝이 났지만, 대답은 ‘왜’ 인지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해야 했다. 나는 그 망설임이 또 좋았다. 주저하며 고민하는 내가, 입을 닫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내가, 그래서 내 생각을 표현하는 내가 좋아졌다.      


결국 나는 쓰는 내가 마음에 든다. 글이 안 써지고 모자란 글을 쓸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뭐든 쓰려하는 내가 이전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발성과 발음, 전달력을 연습하던 나에서, 주변의 소리와 풍경, 장면을 응시하는 내가 되었다. 삶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자세와 뭐든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내가 조금은 작가 같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게 혹은 이 세계에 일어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뭔가를 끄적이는 일이었다. 이런 끄적임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게 어떤 글이든, 쉽게 쓰여지는 글은 없다. 이런 식이다. 문장을 하나 쓴다. 그다음에는 침묵이다. 그러다가 문장 하나를 더 쓴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다. 문장을 쓸 때마다 만나는 이 침묵은 완전한 무無처럼 느껴진다. 그때 나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인식의 끝에서 더듬거리는 중이다.’
...

이렇게 또 하나의 시절에 마침표를 찍는다.    
                                                                          

- 김연수 <시절일기>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탄생한 한 줄의 문장을, 고민과 생각으로 늘려 한 편의 글로 완성할 때 나는 기분이 째진다. 마지막 마침표가 잘 찍히면 그날 하루,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대도 완벽해진다.


이렇게 또 하나의 글에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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