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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Nov 08. 2019

제가 ‘신촌 민들레영토’ 알바생이었는데요.

그곳에서 지금의 신랑을 만났어요

결혼을 한지는 2년이 조금 넘었다. 아직 신혼이라 불리는 시기. 남편, 신랑이라는 단어보다는 오빠라는 지칭이 편하고, 나는 그마저 이름으로 잘 부르기도 한다. 오빠는 이름이 예쁘다. ‘이상화’ 누군가는 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를 누군가는 시인을 떠올린다. 시인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연배가 있거나 문학을 좋아하거나.     


스무 살 때 처음 만나 서른셋에 결혼했다. 무려 13년 동안 연애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이지만 다시 써보면, ‘스무 살 때 처음 만났고, 그 후 서른셋에 우연히 다시 만나 결혼했다’로 써야 정확하다. 그사이 우린 각자의 생에서 각자의 연과 만났다 헤어지며 이십 대를 보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민들레 영토’라는 곳이 있었다. 오천 원을 내면 컵을 하나 주는데 그 컵으로 무한대로 음료를 마실 수 있고, 컵라면 또는 곡물빵 하나를 무료로 준다. 아침햇살과 미숫가루 같은 음료는 ‘참살이 음료’라 불리며 세 번까지만 리필을 받을 수 있다. 알바생 들은 참살이 음료를 줄 때는 컵 밑에 작게 표시를 한다. 유니폼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리게 하는 빨간색 체크무늬 멜빵 치마에 머리에도 빨간색 띠를 두르고, 손님을 보면 양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내가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는 건 대학생 때 그곳에서 알바를 1년 넘게 했기 때문이다. 신랑과 나는 그곳에서 알바생으로 처음 만났다.  


ⓒ 민들레 영토 종로점 (아직 있다)


    

내가 대학생일 때 민들레영토는 엄청난 유행의 공간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생이라면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곳의 알바생들은 얼굴을 보고 뽑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잘생기고 예쁜 대학생 알바생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음료를 계속 퍼주는 곳. 게다가 다른 곳들보다 알바 시급이 높아서 누구나 한 번쯤은 그곳에서 알바를 하고 싶어 했다. 대학생 때 신촌에서 자주 놀았는데, 신촌 민토에서 알바를 뽑는다는 모집공고를 보고 주말 알바를 지원했다. 분명 외모를 본다고 했는데 내가 된 걸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곳에서 신랑은 그때 당시 ‘과장님’이었다. 서비스업에 특출난 열정과 재능이 있었던 그는 알바생 임에도 불구하고 ‘과장’으로 직급을 달며 다른 알바생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출근을 하면 직원들 복장부터 상태 체크를 하고, 1층 메인에서 손님들을 환대하고, 컴플레인이나 알바생들이 해결하지 못할 일이 발생하면 출동하는 ‘알바 관리인’이었다. 일종의 알바생들의 워너비이자 슈퍼 울트라 아르바이트생 같은 것이다. 나보다 4살 위에다가 과장님으로 불렸던 한없이 높아 보였던 그를 나는 반말을 하며 편하게 대했다. 말만 과장이지 만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정말 그냥 단지 진짜 완전 오빠 동생 사이. 이성적 감정이 전혀 없었다. 각자의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가 있었고, 서로의 스타일도 절대 아니었다. 때문에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나누었다. (그럼 뭘 나눴다는 거지? 정?) 그런데 13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우린 사랑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나누는 부부가 되었다.  


    

오빠에서 아빠로




스물여덟 때부터 지역 MBC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오빠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서서히 그의 존재는 잊혔고, 민들레영토라는 말만 들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나이가 되었다. 추억은 왜 항상 촌스러움을 동반하는가. 대학생 때 그렇게도 예뻐 보였던 빨간 체크무늬 멜빵 치마 유니폼이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매일 그 옷을 입고 손을 미친 듯이 흔들며,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 환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센 시급의 위력이었나, 믿도 끝도 없는 스무 살의 자신감 때문이었나. 둘 다 였던 것 같다. 하긴 스무 살 땐 뭘 입어도 예쁠 나이다. 패션의 완성은 스무 살.     


서른셋의 여름이었다. 제주 MBC에서 근무했던 때라 나는 섬에 혼자 살고 있었다. 외로운 섬 처녀, 제주의 더운 바닷바람을 맞고, 심히 대상도 없는 그리움에 사무쳐 어느 날 밤 카톡을 뒤져보기 시작한다. 그러다 한 이름이 튀어나오고 마는데... ‘이상화’ 그렇다. 나는 그 이름 석자에 전 국가대표도 시인도 아닌,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갑자기 민토 유니폼을 입게 된 기분이 들면서 그에게 바로 손을 흔들며 카톡을 보냈다. 너무 오랜만이라고. 잘 지내냐고. 나는 섬에 산다고.      


하지만 실체 없는 그리움에 사무쳤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연락이 끊긴 건 5년이 넘었는데 답장이 온건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늦은 밤 우린 다시 스무 살 알바생과 스물넷의 과장님으로 돌아가 미친 듯이 삶의 이야기를 리필했던 것이다.     


손님! 수다 한 컵 리필해 드릴까요?


나는 그가 당연히 결혼을 했을 거라고, 적어도 애 둘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서른셋이었으니 그는 서른일곱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결혼을 인생의 아주 중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 그는 일찍이 결혼해 알콩달콩 아이들과 잘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오밤중에 카톡을 보냅니까??) 하지만 우린 같았다. 둘 다 외로웠던 것이다.     


나는 다음날부터 제주의 바다 사진을 시도 때도 없이 보내며 그를 찔렀다. 제주에 놀러 오라며 마구마구 쑤셨다. 우리 집은 복층이니까 위에서 자면 된다고 아주아주 들쑤셨다. 하지만 그는 돌하르방 같았다. 나는 연애나 해 볼 심성으로 마구 들이댔는데, 그는 결혼을 할 심성으로 아주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와 처음 키스를 나누었을 때 그는 말했다. “됐다!” 이 짧은 감탄사는 서로 정말 그냥 단지 진짜 완전 오빠 동생 사이인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의 탄식이었다. 많은 지인들이 물었다. “그렇게 정말 아무 감정 없는 오빠 동생 사이었다가 갑자기 연인이 될 수가 있어?” 사실 우리도 우리에게 수없이 물었다. ‘어이 자네들!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우리가 키스를 할 수 있다면 결혼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키스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가장 큰 공통점은 묵묵히 서로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열심히 반짝이기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청춘.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알바를 했고, 용돈을 벌었고, 더 나은 기회와 앞날을 위해 노력했다. 우린 서로의 그 노력을 가장 열렬히 존중하는 사이다. ‘당연히’ 부모님의 도움 하나 없이 결혼을 준비했고, 그것이 무엇이든 최대치로 간소화했다. 단 하나. 아낀 돈을 신혼여행에 퍼붓자! 그렇게 몰디브 에머럴드 빛 인도양에서 생의 가장 사치스러운 며칠을 보냈다. 그 호사는 조금 어색했고 많이 행복했다.     


신혼집을 위해 오빠는 대출을 받았고, 나는 고맙다 말했다. 4번의 이케아와 17번의 다이소, 2천 5백 번의 클릭이 있었다. 그 드나듦과 클릭 속에 어떤 때는 최저가로, 어떤 때는 퀄리티를 입에 올리며 더 좋을 거라 믿는 비싼 가격의 결제가 있었다. 물론 할부도 함께했다. 애정과 고민이 섞인 물건들에 이름과 의미가 부여됐고, 그것들은 하나 둘 제자리를 찾았다. 오빠는 말했다. 의식의 진화에는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까지도 뻗친다고. 난 동의했고, 그 마음이 닿았는지 거실에 놓은 뱅갈 고무나무 화분에는 연두색의 새잎이 피어났다. 우린 잘 살자 다짐했고, 무엇보다 서로 노력하자 결심했다. 행복하다.라고 표현해도 좋을 순간이었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잘 흘렀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다짐과 결심은 하루와 순간 앞에 잠시 무너질 때도 있었다. 다행인 건 곧 다시 마음먹고 서로에게 가장 빙구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며칠 전 오빠는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왜 안 싸우는 줄 알아?” “왜?”

“서로에게 기대하는 게 없어서야!”     


정답! 나는 오빠에게, 오빠는 나에게 기대하는 게 전혀 없다. 그러니 싸울 일도 잘 없다. 기대치가 없다는 건 희망과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혼자 상대방을 부풀리고 꺼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다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의 시간들도 서로에게 열렬히 기대하지 않으며 살아볼 작정이다.      


‘기대하지 말고 기대지도 말 것. (가끔 진짜 힘들 땐 기대도 됨) 그렇게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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