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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Feb 28. 2020

오해 없이 이해하고 싶다.

- 우리 모두의 ‘휴머니즘’을 위하여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단연코 ‘작은 아씨들’을 꼽을 것이다. 감독의 연출, 배우들의 연기, 음악, 미술, 의상, 장면 하나하나 다 흥미로웠다. 1868년에 쓰인 150년도 넘은 이야기가 가공되고 영상으로 만들어져 2020년의 나에게 준 감응은 대단했다. 네 자매 중 글을 쓰는 둘째 조(시얼샤 로넌)에게 당연히 감정이입이 많이 됐지만, 다른 자매들, 그들과 함께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로리, 어머니, 대고모 등등 출연하는 모든 배우와 역할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소설가를 꿈꾸는 조가 아닌 인물 모두가 다 평등하게 주인공이구나. 그리고 그것은 이야기의 줄기이자 감독의 힘이구나.     

 

한 인터뷰에서 영화를 만든 그레타 거윅 감독과 배우들이 질문을 받았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입니까?”


그러자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휴머니즘입니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의미라는 걸 깊게 공감했다.


      


ⓒ '휴머니즘' 영화 '작은 아씨들'





작년 나이지리아 출신 미국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한국에 왔을 때 강연을 들으러 간 적이 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나는 페미니스트 작가가 아니라 작가고,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며 강연 내내 여러 인상 깊은 말들을 들려주었다. 강연 후 인증샷을 SNS에 올렸는데 몇 분 후 아는 오빠가 댓글을 달았다.


‘무서워’


나는 순간 그 세 글자가 너무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그 오빠에게 당장 전화를 해 뭐가 무섭다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연락한 지도 오래돼 답글로 물었다.


'도대체 뭐가 무섭다는 거야?'


다음날 그 댓글은 삭제되었다.      



질문: 이 사진이 무서운 이유를 알려주세요!



나는 그 오빠가 페미니즘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핵심은 남성 혐오나 여성 우월주의가 아닌 ‘평등’인데 왜, 무엇이 무섭다는 건지.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강연을 들은 내가 무섭다는 이야기인가? 순간 혼란스러웠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말했다. “페미니즘은 남녀 간의 위계질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를 없애는 것이다.” 인터뷰 영상 링크를 그 오빠에게 보내고 싶었다.   

  





글쓰기 모임에서 한 학인이 말했다.

 

“저는 솔직히 노동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읽는 게 힘들어요. 안쓰럽고 무거운 마음이 드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서 왜 그런 글들을 일부러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주변에는 다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잘 없거든요.”


나는 조금 당황했고, 이내 이해하려 노력하며 내가 어떻게 이 질문에 현명하게 답을 해야 하는지에 집중해 말을 이어갔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은 저도 마음이 아프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긴 인생을 살아가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각자의 배경이 있고 사정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는 폭이 아주 좁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당황하거나 실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그런 입장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죠. 삶은 길고 이야기는 다양하기에 여러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내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가 잘 대답한 걸까? 더 좋은, 더 알맞은 말은 없었을까? 그분은 나의 말을 이해했을까?     






며칠 전 아는 동생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들을 나누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근데 얼마 전 서점 갔다가 박상영 작가? 대도시의 사랑법 그 책을 읽었는데 나 깜짝 놀랐잖아! 그런 책인지 모르고 샀어. 겉표지 예뻐서 샀는데. 으 너무 이상했어!”


그 책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퀴어’ 소설이었다.     



표지가 예쁘긴 하네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작가>






나는 한동안 ‘악의 없는 무지한 말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페미니즘’이 무섭다고 하는 말, ‘약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다는 말, ‘퀴어’가 이상하다고 하는 말들에 대하여.     


그들은 페미니즘을 비판하거나, 약자를 배척하거나, 퀴어를 거부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잘 몰라서’ ‘낯설어서’ 그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친분이 있는 나에게 보인 질문과 반응들은 주장이 아닌 일종의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걸 알아서 그들에게 반박이나 비평이 아닌 설명과 해석을 붙여주고 싶었다. 나 또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고, 약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하고, 퀴어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그런 얘기들에 관심이 많고 남들보다는 조금 더 접했기에 지금의 이해 폭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 나도 부족하다. 그러니 내가 더 많이 알고 깨닫고 받아들여 이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잘 돌려주고 싶었다.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인간의 존엄’이 있다. 나 역시 불편하고 귀찮고 무지한 마음들 때문에 종종 모르고 실수하고 잊곤 한다. 그러니 자꾸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해, 평등, 존엄, 사랑에 대해서. 반복해서 얘기하고 나누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도, 사회 속 약자들도, 성 소수자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 ‘사람’이니까. ‘휴머니즘’의 주어는 단수가 될 수 없다.      


그 오빠와 함께 작은 아씨들을 또 본 후 얘기 나누고싶고, 그 학인과 함께 노동자인 나의 아버지와 밥을 먹고 싶고, 그 동생과 함께 올해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계획이라는 ‘여자’ 지인의 결혼식에 함께 가고 싶다. 이 마음에서 중요한 것은 ‘함께’다. 오해 없이 이해하고 싶다. 혐오도 차별도 없는 우리 모두의 ‘휴머니즘’을 위하여 건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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