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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r 13. 2020

임희정은 소설이 쓰고 싶어서

다시 글 앞에서 '똥멍충이'가 되었다.

소설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생각이 들었다.

    

“픽션이니까.”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소설 속 인물, 사건, 배경에 감탄하면서도 끝내 이것은 다 ‘허구’라는 생각이 꼭 들었다. 본디 나라는 인간은 가공된 이야기엔 흥미가 떨어졌다. 가짜 같았다. 누군가 직접 겪어 애절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소설의 감탄은 ‘어찌 이런 이야기를 쓸까’였고, 수필의 감탄은 ‘어찌 이런 생을 살았을까’였다. 글과 삶의 영역에서는 항상 삶이 컸고, 대단했고, 우월했다. 상상과 창조보다 경험과 체득이 우세하다 믿었다. 그러니 나에게 소설은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 화려하고 멋지고 눈부셨지만 내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나는 당장 만날 수 있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수필 같은 지인을 원했다.  




    


그런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소설 수업도 듣는다. 단편도 썼다. 감히 등단이라는 원대한 꿈도 꾸어본다. 하지만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품어본다. 꿈이니까.


막연한 생각에 소설은 범위가 없고,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 마음이 나에겐 글의 미래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쓰는 에세이는 경험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이야기지만 때로는 그 경험이 한계가 되기도 하기에, 내 글을 좀 더 확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았다. 다 무지한 생각이었다. 쓴다는 것. 특히나 그 장르가 소설이라면 더. 그 위대함 앞에서 나는 겁이 없었다.     



소설. 그 위대함에 대하여.




소설 수업에서 선생님은 말했다.


“저는 나중에 제 아들에게도 가능하다면 소설을 쓰게 하고 싶어요. 왜냐면 소설의 세계에는 질서가 있거든요. 그 질서를 알게 해 주고 싶어요.”     


소설과 질서라니. 나는 의아했고, 감탄했다. 상상은 무질서한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길거리를 걷다 갑자기 돌을 맞을 수도 있고, 벼락을 맞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 돌을 맞고 벼락을 맞으려면 나름의 암시와 묘사가 있어야 하죠. 공사장 근처를 지나갔다던가 날씨가 요란했다던가 하는 것들. 그러한 설명이 없다면 독자는 당황합니다.”     


소설 안에 질서가 필요한 이유다. 아무 이야기나 막 쓰고 싶어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의 멍청함이 부끄러웠다. 나름 책도 냈고, 연재도 하고, 정기적으로 글을 쓰지만 역시 나는 아직 글 앞에서 똥멍충이다. 작가는 무슨. 다시 처음 걸음마를 익히고 한글을 떼듯 소설을 배우고 글을 써야 한다.     



 

수업 합평을 위해 A4 13페이지짜리 단편을 썼다. 토할 것 같았다. 집 근처 카페를 전전긍긍했고, 중학생 때 이후로 가지 않았던 독서실에도 가봤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너무 괴로웠다. 하루에 한 줄도 늘리지 못하는 내 모습에 매일 실망했다. 이래 놓고 무슨 소설을 쓰겠다고. 제일 큰 문제점은 쓰면서도 자꾸만 내 글이 소설 같지 않고 에세이 같았다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나였고, 사건은 내가 겪은 이야기였으며, 배경은 내 지난 과거였다. 나는 또 수필이나 쓰고 앉아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내 글을 보고 말씀하셨다.    

 

“에세이스트가 쓴 소설 같아요.”     


이불킥 백번을 하고 싶었다. 한 편의 소설을 위해 그동안 쓴 에세이를 다 삭제하고 싶었다. (진짜?)   

  

설명이 아닌 묘사를 해야 하는 소설의 영역에서 나는 자꾸만 내 사유를 나열하고 있었다. 단편 하나를 쓰고 나는 다양한 종류의 실망과 절망을 맛보았다. 세상 모든 소설가가 존경스러웠다. 비로소 보였다. 책장에 꽂혀있는 소설책을 아무거나 펴내 아무 페이지나 읽어보아도 그냥 쓰인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소설로 뭔가 거대한 걸 말하고 싶었나 보다. 잘 꾸미고 가공하고 포장하고 싶었나 보다. 다 필요 없고, 소설은 ‘재미’ 있는 글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소설은 나를 위한 글이 아니다. 착각했다. 에세이로 겉 멋들어 있었다.      


소설 가벼운 나날을 쓴 제임스 설터는 말했다.  



   

우리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것은 가느다랗다.     




가느닿란 소설을 쓰고 싶다. 부족한 내가 많이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처럼 마흔 살에 등단하는 꿈을 꾸어본다. 3년 남았다. 서른일곱에 새로운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고, 3년이 지나도 등단할 수 없을 것 같아 슬프다. 그래도 눈물을 흘리는 대신 뭐라도 끄적이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계속 읽고 오래 쓰는 것’이니까. ‘버티는 것’이 작가의 재능이라고 했다. 오늘도 ‘빈 문서 1’을 붙잡고 버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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