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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정 Mar 27. 2020

글은 그 사람을 닮아있다.

자기 생에 제목을 달고 저자명에 내 이름 석 자를 새긴 글

글쓰기 수업이나 모임에 가면 그곳에 온 사람들은 궁금하지 않다. 그 사람들이 써 올 '글'이 궁금하다. 글쓴이가 풀어낼 이야기와 품은 생각이 아주 많이 궁금하다. 나는 그 사람의 나이도 직업도 배경도 모르지만, 합평 시간에 마주하는 한 편의 글에서 그를 눈치채고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글을 가까이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생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내 생각이 누군가의 생각과 맞닿을 때, 나는 계속 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다.    

 


매주 금요일 소설 수업에 간다. 시작은 15명 정도 되었으나 합평 순서가 오고 시간이 흐를 때마다 한 둘씩 사람도 줄었다. 내 글이 부끄러워서 내 글을 쓰지 못해서 선생님이 혼을 내는 것도 아니고 벌금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쓰지 못했다’는 이유와 무엇보다 ‘잘 쓰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몸을 배배 꼰다. 한낱 글자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문우들의 그 몸 둘 바 모름이 참 귀엽다. 나도 내 합평 날 스크류바가 되었다.   


한낱 글자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문우들의 그 몸 둘 바 모름이 참 귀엽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에 있다는 걸. 등단이 아니라 한 편의 단편을 완성해 보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단톡 방에 누군가의 글이 올라오면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파일을 열어 그 글의 첫 번째 열혈 독자가 되어준다.   

   

한 편의 글은 그 사람을 닮아있어서, 그 사람이 담겨 있어서, 나는 글 속에서 자주 낯 모르는 문우의 생을 함부로 짐작해 보곤 했다. 하지만 어림잡아 본 그 예상은 대부분 맞는 경우가 많았다.      






20대 중반 즈음의 한 문우는 샤기컷 헤어스타일에 올 블랙 패션을 즐겨 입었다. 수업이 끝나면 건물 앞 흡연 구역에서 어김없이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며 연기가 흐르는 방향의 반대 방향을 따라 집으로 오곤 했다. 합평 날. 그녀가 쓴 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담배와 맞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주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나는 그 문우가 강하고 진한 외모와는 달리 연하고 부드러운 로맨스를 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30대 초반의 한 문우는 처진 눈에 선한 인상과 조심스러운 말투를 갖고 있었다. 수업 시간 말 한마디를 하면 금세 얼굴이 빨개졌고 그러면서도 조목조목 자기의 생각을 유연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녀가 쓴 소설 속에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한 친구가 나왔다. 부리고, 시키고, 이기적으로 주인공을 대하지만 그 친구를 무시할 수도, 인연을 끊을 수도 없는 주인공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합평 때 우리는 모두 소설 속 그 친구를 욕했다. 왠지 그녀의 표정이 좋아 보였다.     


40대 중반 즈음의 한 문우는 수업 전 항상 바둑책을 보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썼고, 구수한 사투리를 썼다. 합평 날. 그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은 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복잡하고 우여곡절도 많은 가정사의 한복판을 통과할 때도 그가 아버지와 어김없이 하는 유일한 일은 말없이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소설의 말미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말한다. “인자 니는 니 바둑 두라. 나는 내 바둑 둘란다.” 모두 그 문장이 가장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문우가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도 혼자 바둑알을 던지거나 물리며 천천히 한 수 두었을 것만 같았다.

    

50대 초반 즈음의 한 문우는 다 키운 자식을 둘 둔 엄마였다. 문우들 중 가장 목소리가 컸고, 말이 많았으며, 잘 웃었다. 합평 날. 그녀는 시댁 이야기를 글로 써왔다. 시어머니를 때리고 가족들에게 모질게 했던 시아버지를 며느리만이 유일하게 감싸주는, 글 속 소재로 올갱이아욱국이 나오는 소설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대학 때 국문과를 나왔고 친구 중에는 등단을 한 사람도 있다고. 졸업하고 몇십 년이 지나서야 이렇게 처음으로 단편을 완성했다고. 사실 그녀는 수업 내내 계속 글을 못 쓰겠다고 했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글을 완성해 칭찬도 분석도 다양한 의견도 들었다. 나는 그녀가 끓인 올갱이아욱국 맛이 궁금했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주 쓰고, 많이 읽고, 넓게 관계 맺고 싶다.




몇 주 동안의 합평을 거쳐 나는 생각했다. 소설 수업을 통해 생의 첫 단편 소설을 쓴 우리는 어쩌면 모두 소설을 핑계 삼아 각자의 인생을 쓴 건 아닐까. 우리가 거쳐온 삶 속에는 각기 다른 장르의 소설책 몇 권이 담겨 있고, 우리는 쉽지 않았지만 그 책을 꺼내 다시 공들여 다듬어 보았다. 자기 생에 제목을 달고 저자명에 본인 이름 석 자를 적어 단톡 방에 공유하고 읽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 맘 다해 작가이자 독자가 되어주었다.     


이제 우린 어쩌면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인연이지만, 서로의 글을 기억하며 다른 곳에서 또 삶을 이어가고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는 또 배웠다. 한 사람의 글로 그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무구하고 깊은 것이다. 참 좋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자주 쓰고, 많이 읽고, 넓게 관계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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