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희정 Oct 11. 2020

출간 작가가 글 쓰는 법

글은 언제나 쓰고 싶고, 막상 쓰기 싫다.

글을 쓰기로 한다. 노트북을 켠다. 파일을 연다. 이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 아주 많다. 조금 살펴보다가 ‘새 문서’를 연다. 이어 쓸 자신은 없고, 새로 쓸 마음은 조금 있다. 그렇게 또 한 편의 새로운 글이 시작되고, 이 글 역시나 마무리 짓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뭐라도 써야 한다. 나는 ‘출간’ 작가고, 첫 책이 유작이 되면 안 되니까. 글은 언제나 쓰고 싶고, 막상 쓰기 싫다.     






‘빈 문서 1’의 커서가 깜빡인다. 한숨이 나온다. 막막하다. 갑자기 써보겠다는 사기는 꺾이고 집중력도 급격히 떨어진다. 누가 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도망치고 싶다. 휴대전화를 열어 SNS를 본다. ‘좋아요’와 ‘하트’를 누른다. 가끔 댓글도 쓴다. 댓글 말고 그냥 글을 써야 하는데 생각한다. 인터넷 기사를 본다. 유튜브도 본다. 영상 세 편 정도를 볼 때쯤 죄책감이 몰려온다. 아. 나 글쓰기로 했지. 넷플릭스는 차마 누르지 못하고 다시 ‘빈 문서 1’로 돌아온다.      


죄책감에 떠밀려 몇 줄을 쓴다. 막힌다. 휴대전화 메모장을 들여다본다. 두서없이 마구 썼던 낙서 같은 단상들이 한가득이다. 모두 내 생각들인데 참 어지럽다. 메모는 쉽고 글은 어렵다. 일기는 쉽고, 에세이는 어려운 것처럼. 글을 쓰기 위해 수시로 메모를 하는 건 좋은 습관이지만, 메모를 글로 확장시키는 건 습관처럼 안 된다. 그러니 완성된 글은 적고 미완성의 메모는 많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글이 책이 되려면 ‘분량’이 있어야 한다.  


 


  

글이 책이 되려면 ‘분량’이 있어야 한다.




또 몇 줄을 쓴다. 또 막힌다. 이번에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살펴본다. 읽었거나, 다 못 읽었거나, 하나도 못 읽은 책들이 한가득이다. 모두 내가 산 책이지만 참 많다. 책은 읽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돈 쓰기는 쉽고, 버는 건 어려운 것처럼. 글을 쓰기 위해 수시로 책을 사는 건 좋은 습관이지만, 습관처럼 독서가 안 된다. 자꾸만 졸리고 하는 거 없이 바쁘다. 그러니 항상 읽은 책 보다 ‘읽을 책’이 무척 많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나의 글은 언제나 한계가 가득하고, 누군가의 좋은 글은 항상 나를 쓰게 한다.

    

또 쓴다. 쓴 만큼 지운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결이 맞는 것 같지 않아서. 무언가 많이 쓴 것 같은데 결국 남는 건 몇 문장뿐이다. 공허하다. 몇 시간을 공들인 결과가 단 몇 줄 뿐이라니. 하지만 지워진 글자들은 글이 아니다. 흔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인정받을 수 없다.       


퇴고는 고통 그 자체다. 고치고 다듬을 때마다 나의 무능과 무식을 마주한다. 이래 놓고 무슨 작가라고. 자책하고 다시 고친다. 사실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고치는 사람이다. 자명한 건 고치는 만큼 글은 나아진다. 그래서 퇴고에 아주 많이, 진짜 많이 공들인다. 내 글을 제일 많이 읽는 건 나다. 신기하게 읽을 때마다 고칠 게 보이니 계속 읽으며 퇴고한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은 외울 정도로 읽으며 고친 글이었다. 내가 내 글에 질려버릴 때 가장 완벽한 글이 완성됐다.     






언제나 글은 나를 좌절하게 하는데, 왜 또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쓰기의 괴로움만큼이나 쓰는 기쁨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글 한 편을 쓴다고 승진을 하거나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데, 하얀 빈 문서가 까만 글자들로 채워지고 제목을 달고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어지럽고 시끄러웠던 마음이 정돈되고 평온해진다. 형체 없고 희미한 생각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나는 선명해진다. 흐뭇해진다. 그래서 쓴다.    





형체 없고 희미한 생각을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나는 선명해진다.




출간 작가라고 별수 있나. 매번 처음 글 쓰는 사람처럼 두렵고 망설이는걸. 두 권, 세 권, 열 권, 수십 권을 쓴다 해도 똑같은 것을. 그러니 누구나 쓸 수 있고, 아무나 쓸 수 없다. 다만 많이 그리고 자주 쓸수록 그 공포와 방황에 단련될 뿐이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쓰는 사람’이다.     


나는 쓸 때마다 괴롭고, 쓰지 않을 때도 괴롭다. 작가인 나의 삶은 쓰거나 쓰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괴로울 예정이다. 그런데 쓰는 괴로움보다 쓰지 않는 괴로움이 더 커서 기꺼이 이 곤란을 반복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쓸 때의 괴로움은 쓸수록 괜찮아지고, 쓰지 않을 때의 괴로움은 안 쓰면 배가 되니까 또 쓰는 수밖에 없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렇게 써냈다. 제목까지 달고나면 기분이 째진다. 신난다. 또 한 편의 글이 완성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먼저 써! 나는 이미 글렀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