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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Jul 29. 2019

'어른'을 거부하고 싶다.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내가 어른이라니?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본래 이기적인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이중성은, 조금 더 강렬한 종류의 것들이 많다.


학창 시절에 경험했던 인간의 이중성이 보통 교우관계, 성적에 대한 열망 등 방법은 그릇된 방향으로 변질되었을 지라도, 최소 어떤 '순수한 목적'에서 출발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사회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이중성은 그 목적부터가 불순하거나, 애초에 목적조차 읽을 수 없기도 하다.




이를테면, 나와 여성 동료에게는 성희롱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잘못인 줄도 모르고) 내뱉던 직장동료가, sns에선 투철한 정치적 사명감과, 자신의 기여에 대해 열성적으로 논하며 깨어있는 진보인으로서의 일침을 구구절절 장문으로 서술한 것을 목격했던 것과 같이.


하긴 나도 사회로 나오며 이중적인 모습을 좀 더 많이 갖게 된 것 같기는 하다. 학창 시절에는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가 있으면 애초에 어울리지 않거나, 심하면 서로 크게 한 번 다툰 후 멀어지는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마무리했던 것 같은데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조금 더 어렵고 이해관계가 많이 깔려있기에 그러질 못 해서.


자꾸 개인비서 부리듯이 나에게 오만가지 잡일을 시켜대는 상사에게 화를 내지 못했고, 내 가치관과 심하게 어긋나는 이야기들을 자꾸 내뱉으며 날 피곤하게 만드는 동료에게 대화 단절 선언을 하지도 못 했다. 




속으로 참을 인자를 수십 개씩 새겨가며 안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 자신이 굉장히 이중적이라고 느끼며 조금은 슬퍼지는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여럿 보았다. 


그런데 나는 이게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어른이 된다는 게 참 슬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화 역시 만들어가는 것이라지만 누군가의 역겨운 이중성과 부당함을 감내해야 하고,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하에 이중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사회화라니.


그리하여 부모님은 내게 늘 이야기했던 것일까. 

'사회에 나가면 더한 것도 많아' 

'돈 벌기 시작하면 더럽고 치사한 게 얼마나 많은데' 

'공부만 할 때가 좋은 거야'

...라고.


서른이 다 된 나이임에도 아직도 가끔 집에 가 있을 때 모르는 타인이 초인종을 누르고 "어디 어디에서 왔는데요,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하면 "어른 안 계세요"라고 대답할 때가 있다.    


오늘도 나는 이미 강제로 어른의 세계에 던져져 어른이 '되어버린 것'을 온몸으로 저항하며 "어른 안 계세요" 외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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