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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Nov 16. 2018

벙어리가 될 것이냐, 사회부적응자가 될 것이냐

성공과 연관관계를 지니는 그릿점수가 한국사회에 적용된다면

외국의 한 유명 대학교에서 성공과 연관되어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긴 연구를 한 결과, 성공은 그릿 점수와 연관이 큰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릿 점수라는 건, 조사 대상인 모집단의 사람들에게 일정시간 런닝머신을 뛰게 한 후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얼마나 더 오래 뛰는 것을 지속했는가’에 해당하는 점수다. 그릿 점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시간이 흘렀을 때 사회적으로 성공해있을 확률이 현저히 높았다고 한다. 즉 이 실험은,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포기하지 않고, 참고 더 달려보자는 교훈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결국 성공에 한 발짝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나의 그릿 점수를 높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세상에는 한계치의 상황에서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한다.






내겐 이런 경험이 있다. 


노동 계약서 상 명시 돼 있는 나의 퇴근시간인 6시를 정확히 지켜 퇴근해본 적은 단연코 하루조차 없지만, 일곱시가 넘도록 퇴근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던 하루가 있다. 물론 할 일은 늘 여섯시 이전에 다 끝내놓았었다. 한 시간이나 참던 나는 선임에게 결국 먼저 물었다. "할 일을 마쳤는데 퇴근해도 됩니까?"


돌아온 답은,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대표님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라"였다. 다른 직원의 실수로 대표의 기분이 조금 언짢은 일이 있어 분위기가 좋질 않았기 때문. 아, 물론 대표는 언짢은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무려 저녁 5시에 회의를 소집하는 리더십을 보여주기까지 했음에도 불쾌함이 다 가시질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에서 대표가 퇴근할 때까지(물론 언제일진 모르나) 참아 그릿점수를 높인다면 나의 미래 성공 지수는 매우 높아졌을까. 아니면 한 시간이나 참은 나의 행동 또한 나의 그릿점수를 높인 것이므로 나의 미래 성공지수는 아주 조금이라도 높아졌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주 조금이나마 내 그릿점수가 높아졌다 할지라도 그 그릿점수가 내 미래의 성공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것 같은 거다.


그렇다면 퇴사하고 싶은 나의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아 한계치를 버텨 내 그릿점수를 높인다면 그건 내 성공이랑 연관이 있었을까? 물론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저명한 연구기관이 몇 십 년간이나 공들인 실험에서 잘못된 연구결과를 낼 리가 없건만 왜 그런가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기는 미국’이고 ‘여기는 한국’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물론 운동이나 공부 정도는 우리 사회에서도 조금 그릿점수에 관한 요소가 적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견고한 가부장적 문화, 꼰대문화로 겹겹이 쌓아 만들어진 견고한 이 나라의 구조 아래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것에 그걸 적용하자면 글쎄다.







그런가 하면 불과 어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모교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요즘은 어떠한지 구경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들과 학생들과의 훈훈한 한 때를 실어놓은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서 ‘참 스승의 도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한 교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불쾌해졌다. 


그 교수님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주변 여러 학우들에게 새벽에 지속적, 개인적으로 계속 연락을 취하고, 성추행을 일삼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뻔뻔한 얼굴로 스승의 참된 도리를 입에 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기가 힘들었지만, 내게도 어쩔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인터넷 창을 종료하는 것으로 불쾌감을 접어두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 역시 불쾌감을 참을 수밖에 없던 내 행동으로 인해 내 그릿점수는 높아진 걸까.







불쾌감을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섰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증거도 없이 무언가 이득을 노리고 교수를 위해하려는 소위 ‘꽃뱀’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 될 일이다. 그러니, 현격히 낮아질 수 있었던 그릿점수를 지킨 꼴이다.


현재의 한국 사회 아래서는 한계를 참아내 그릿점수를 높이는 것은, 구조적 모순과 불의에 순응하는 벙어리로 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에서 그릿점수를 높이느냐 마냐 하는 것은, 순종하는 벙어리로 살 것이냐,사회생활도 모르고,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참을성 없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 찍힐 것이냐 하는 문제라고.


이전 12화 '소확행'의 유행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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