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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판적일상 Mar 07. 2019

장거리 비행기, 아기울음소리를 들으며  

고통에 대한 책임이 개인을 넘어서기를

5시간 이상을 앉아 있어야 하는 비행기, 그것도 새벽출발 비행기 안에서 내게 가장 힘든 것은 단연코 잠을 청할 수 없게 만드는 '소음'이다. 그 '소음'들 중에서도 불가항력적이면서도, 언제 끝날지 모르며, 내가 어찌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인지라 1순위로 피하고 싶은 것은 바로 '아기 울음소리'다.


그리하여 이제는, 탑승 전에 승객들을 쭉 둘러보며, 통제가 불가능한 연령의 아기가 몇이나 있는지 대강 눈으로 체크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아기들이 많으면 한숨을 푹 쉬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대략 열 번 가까이 되는 내 해외 여행의 비행기 안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겪지 않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며칠 전 베트남 여행을 위해 오른 비행기 안에서도 그랬다. 퇴근을 하자마자 짐을 챙겨 오른 새벽 비행기에서 나는 너무 피곤해 바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귀가 찢어질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로 인해 몽롱한 상태에서 억지로 잠을 깨고 말았다. 


하필 내 자리는 입구쪽이었는데, 아기 엄마가 아기를 달랠 요량으로 아기를 비행기 입구쪽으로 데리고 와 안고 토닥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 좌석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가장 현장감 있게 듣기 딱 좋은 상석이 되고 말았다. 아기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아기 엄마는 비행 내내 거의 자리에 앉지 못한 채, 좌석과 입구쪽을 왔다갔다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나도 거의 뜬 눈으로 잠을 깼다 잤다를 반복하며 피곤한 상태로 비행을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통제도 되지 않을 정도의 어린 아이를 가까운 거리도 아닌, 일정 시간 이상이 걸리는 비행기에 데리고 타야만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고, 짜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각자에게 내가 모르는 사정들이 있을 수도 있고, 불편하다고 짜증만 낸다고 해서 해결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비행기 안에 소음이 차단되는 조그만 휴식 공간을 마련하는 등,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한 편으로,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은 장소만 바뀌어 왔을 뿐, 아주 예전부터 반복되었던 문제들일 텐데 "왜 조금이라도 해결책은 모색되지 못 했던 것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는 어떤 문제로 인해 한 사회 전체가, 혹은 특정 이익집단이나 기업이 손해나 불편을 겪게 되었을 때, 문제를 인식한 뒤 얼마 안 있어 문제가 해결 되거나, 혹은 해결을 위해 조금의 노력이라도 기울이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문제가 여때껏 해결되지 못 한 채 불편한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불편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 불편한 시선을 감당하며 죄책감을 느끼고, 문제를 해결할 책임자로 지목되는 사람. 이 모두가 특정 '개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너 하나만 참으면', '너 하나만 불편한 시선을 감수한다면'과 같이 가장 쉬운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이와는 약간 다른 성격의 이야기이지만, 인터넷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들로 자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목도한 적이 많았다. 부모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 한 어린아이들로 인해 공공장소에서 피해를 입은 이야기들은 그 세부내용만 바뀌어 올라오며 '노키즈 존' 논쟁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물론 나도 미혼의, 아이가 없는, 그러한 피해를 여러 번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과연 특정한 '개인'이 자유를 누리지 못 하도록 패널티를 주는 것이 과연 이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내가 비행기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승객이라는 특정 '개인'들이 발생한 문제를 그저 참아야 하고, 그 승객들의 눈치를 보면서 아기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는 아이의 엄마라는 특정 '개인'이 아이의 울음을 어떻게든 그치도록 만들거나, 비행기에 타지 않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일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유를 잃어야 하거나, 참아야하는 개인들 모두가 고통받는 '피해자'다. 하지만 지금 대립의 지점이 '개인'의 측면에서 머물기만 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인 중 누가 희생해야 하냐는 논의는 결국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도 못 할 뿐더러, 생산적인 논의로 넘어가지 못 한 채, '갈등'과 '상처주기'를 계속 반복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 없는 개인끼리 치고박고 싸우기를 하는 동안 사회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진 채, 멀찍이서 개인들의 다툼을 관망만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러니 결국 이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논의는 '개인'의 부담을 넘어 '사회'에 대한 책임 요구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낮아진 출산율을 걱정하고, 인구의 유지를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사회 구성원들의 '출산'이 분명 이 사회에 이득을 가져다 주며, 사회를 존속시켜주는 필수자원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하지만 어쨌든 출산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부터 '출산' 이후에 따르는 수많은 책임들은 어쨌든 개인이 대부분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사회가 출산을 요구하는 것 만큼 출산을 결정하는 개인들을 위해 많은 부분을 부담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글쎄다. 부정적으로 답할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그러니 요즘 세대는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연일 심각한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고 매일같이 보도가 쏟아져 나온다. 


결국 사회는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 개인에게 이러한 선택을 요구해야만 한다면, 개인에게 그 요구만큼의 복지를 제공해주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없을 때, 누구든 쉽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시설이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비행기나 기차 등 교통시설 안에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가정들을 뒤로 넘기며 생각한다. 우리를 향한 굉장히 많은 종류의 사회문제들이 더 이상은 개인의 책임에서만 끝나지 않아야 할 것이란 것. 우리가 우리에게 가해진 수많은 고통들을 개인의 잘잘못으로 돌리며 괴로워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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