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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 Jan 11. 2021

[비평] 한 무더기 똥의 대물림 : 삶, 죽음의 선포

[비평문]



한 무더기 똥의 대물림 : 삶, 죽음 의 선포 

- 김태용 「풀밭 위의 돼지」 (2007)





 "아, 똥이 나온다. 똥이."


 위 문장은 소설 속 '나'의 할아버지가 뱉은 마지막 말이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이 이야기의 시초가 담겨있다. 김태용의 「풀밭 위의 돼지」는 단순히 보면 죽은 아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치매에 걸린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한 무더기의 똥을 싸지르고 임종을 맞은 '나'의 할아버지. 그 순간부터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는 시작된 것이다. 이 미친 핏줄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나'는 자기부정을 택하게 되는데, 이는 아들부정의 형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자기부정이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 외로움을 곧 언어와 소통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우리가 의미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언어가 사실은 얼마나 불안한지 되묻는 것이다.


 이 되묻기에 앞서, '나'의 자기부정이 시작된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할아버지의 멋지고 아름다운 죽음을 기대했으나 철저하게 배신 당한 '나'는 자신 역시 한 무더기의 똥으로 점철된 죽음을 맞이할까봐 두려워한다. "나는 한동안 똥을 싸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떠서 지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다시마를 죽처럼 끓여 내 입에 쑤셔 넣었다. 그날 밤 나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녹색의 물똥을 싸댔다." 어릴 적 경험은 '나'의 운명을 거부하려는 노력이 허무하게 끝남과 동시에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동기가 된다. 이러한 운명거부가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이 운명을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이런 자기부정의 형태는 '닮지 말아야 할 구석까지 나를 닮은' 아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아들에게 말함으로써 똥물이 흐르는 핏줄을 물려준 것에 대한 일종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녀석이 나와 닮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녀의 부정을 의심하면서 억지로라도 녀석에게 애정을 쏟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나'의 핏줄부정(?)은 이렇듯 많은 문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운명을 잊게 해주는 단 하나의 안식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일 것이다. 소설엔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녀와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대화로 둘의 애틋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어쩌면 운명에 맞서 버틸 수 있게 해주던 힘인 '그녀'가 죽은 것이 그의 치매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의 모습과 운명을 상징하는 아들. 그녀는 그런 아들과의 소통의 매개체로서 존재한다.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녀의 뒤에 숨어 운명을 맞이했다면 이제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운명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첫머리부터 '그녀'를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이 그 캐릭터에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작년에 죽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반전을 선사함과 동시에 '나'가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가 아닌 내가 '돼지의 불알을 걷어'차는 순간부터 소설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야가 확대 전환된다. 그 전까지는 흔히 말해 치매라는 병에 걸린 '나'의 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된다. '돼지의 언어를 안다고 돼지의 삶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치매환자의 삶을 이해하긴 어렵다. 죽은 그녀와 '풀밭에 누워 놀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이나 돼지에게 '오줌을 갈기'는 모습 또는 '고구마를 집어던지'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았을 땐 이상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시선으로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녀와 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한 때이고, 돼지에게 오줌을 갈기거나 고구마를 집어던지는 것도 '나'의 입장과 생각을 안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행동들이다. 주인공이 치매에 걸린 환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앞부분의 돼지와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돼지의 언어를 안다고 돼지의 삶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언어, 이해, 삶 이 세 가지 포인트로 대변되는 문장은 비단 돼지 같은 동물이나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간의 관계 속에서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도 서로간의 삶까지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더욱이 치매환자 같은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머리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삶을 이해하는 것은 가슴까지 필요한 문제이다. 작가는 표면적으로만 사람을 사귀고 이해하는 척 하는 현대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돼지는 주인공에게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지닌다. 외국으로 함께 떠나자는 아들의 제안에 승낙하는 장면에서는 "체념적인 대답에 이어 나는 돼지와 풀밭도 가져갈 수 있다면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어디론가 떠날 때 가장 소중한 것, 중요한 것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풀밭과 돼지라고 볼 수 있는데, '나'는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이 챙겨야할 어떤 것이 비밀스럽거나 떳떳하지 못한 경우 혹은 사적이거나 밝히고 싶지 않은 경우로 볼 수 있다. 주인공은 후자의 경우를 따르고 있다. 자신의 똥물로 더럽혀진 풀밭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소설의 앞부분에서 한구석에 자리 잡고 똥을 싸던 돼지의 모습과 대비되며 교차되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에서 퀠퀠, 거리는 돼지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 문장은 단순히 그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돼지로 상징되는 그의 운명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느낌도 준다. 이러한 장치 때문에 독자들은 왜 굳이 많고 많은 동물들 중에 '돼지'여야만 했는지 의문을 품지 않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풀밭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나'는 풀밭에 '묘혈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누워 쉬는 공간의 의미도 갖는다. "그것은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표현이고 내가 쉬고 있는 것을 옆에서 봐줘요, 라는 간절한 부탁의 의미가 숨어 있었다." 풀밭은 죽음, 운명을 뜻하는 동시에 그녀와의 추억, 안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풀밭을 뒹굴다 한 무더기의 똥을 싸고 만다. 그리고 '더럽혀질 대로 더렵혀진 풀밭 위에 누워 발목의 흉터를 더듬는다.' 죽음의 순간에 발목의 흉터를 더듬으며 그녀를 떠올리는 것이다. 풀밭 밖으로는 몸을 굴리지 않는 모습은 결국 그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녀가 옆에서 자신의 죽음을 지켜봤으면 하는 의미도 가진다. 혹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자신도 가게 됐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아이가 생겨 이사를 오면서 가진 '묘혈원'을 죽음이라는 소설의 끝자락까지 연결해가면서 독자를 이야기 끝까지 함께 끌어가고 있다.


 김태용의 소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소용돌이 안에서 이뤄지는 갖가지 사건들과 감정들의 집합체이다. 이를 통해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삐뚤어진 한 인간의 자기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능동적이고 개척적인 인물로 현실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 속의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압박감, 부당함 역시 나타내고 있다. 어느 하나 긍정적인 인물이나 사건은 없지만 그 속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언어의 표면적인 사용에 대한 자조 섞인 말투에서 독자들이 얻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아닐까. 김태용으로 인해 기괴한 언어들의 흐름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즐기는 독자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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