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잊어버린 계절

"리더는 돈 안 드는 말로도 사람을 얻는다."

by 해림

200시간이라는 파고 높은 교장 자격 연수를 무사히 마쳤다.


6주 만에 복귀한 학교에는 한 달 남짓 비워둔 교감의 공백을 증명하듯, 밀린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다행히 올해는 학교 신축 공사 덕분에 수능 시험장 운영이라는 큰 짐은 피하게 되었다. 해마다 수능일이면 겪어야 했던 그 혹독한 긴장감을 떠올리니, 살다 보니 이런 수월한 해도 오는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험장 운영은 면했지만, 우리 학교 교사 삼십여 명이 인근 수능 시험장으로 파견되어야 했다. 연수 기간 중 교무부장이 작성해 둔 감독관 명단을 훑어보던 나는 절로 한숨을 내뱉었다.


명단에는 수능과 무관한 비교과 교사는 물론, 감독 경험이 전혀 없는 단기 계약직 교사들까지 대거 배정되어 있었다. 반면 평소 건재하게 출근하던 정교사 여럿은 ‘연로하다’ 거나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방패 뒤로 숨어 명단에서 빠져나가 있었다.

내신 성적이 당락을 결정하는 수시전형의 비중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수험생들의 예민함은 갈수록 날을 세우고 있다. 온종일 꼿꼿이 서서 무의식적인 몸짓 하나까지 민원의 대상이 될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수능 감독관 자리는 이제 교직 사회에서 기피 1순위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회피의 무게가 고스란히 약자인 기간제 교사들에게 전가되는 상황은 교육자로서 묵과할 수 없는 불합리였다.


나는 교감으로서 이 비틀린 명단을 바로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불참을 선언한 교사들을 일일이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참여를 독려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얼음장 같은 냉소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교사들이 파견될 학교의 교감으로부터 간절한 부탁 전화까지 걸려 왔다.


"경험 없는 교사들이 너무 많아 운영이 위태로우니, 제발 숙련된 교사를 한 명이라도 더 보내달라"는 호소였다. 무경험자가 포진된 감독실에서 어떤 사고가 터질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교장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 학교 교감, 참 마인드가 이상하네요. 누구든 보내주면 고맙게 받을 일이지, 왜 남의 학교에 전화를 해서 난립니까?”


상대 학교에 대한 배려 없는 역정에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침착하게 불참 의사를 밝힌 교사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려 애썼던 과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격려는커녕 송곳 같은 비아냥이었다.


“교감 선생님, 참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그런 식으로 교사들 압박하면 ‘조직 문화만 흐트러뜨리는 행동’이 된다는 걸 모릅니까?”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발로 뛴 교감의 노력이 순식간에 학교의 안녕을 해치는 행위로 치부되는 순간이었다. 교장의 입에서 나온 ‘조직 문화’라는 허울 좋은 명분은 실상 방관과 무책임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나를 향한 그날 선 선언 앞에서 일할 의욕은 썰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내가 바란 것은 대단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학교 업무를 예사로 넘기지 않고 고군분투하는 교감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이었다. “교감 선생님, 애쓰셨네요. 제가 연수 가신 동안 미리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미 명단이 확정됐으니, 경험 없는 선생님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우리가 각별히 교육해 봅시다.” 그저 이 따스한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이다.


교장 연수 내내 귀가 따갑게 들었던 단어들은 리더십, 소통, 그리고 철학이었다. 교장이라면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참모의 마음을 경청하고, 돈 한 푼 들지 않는 말로라도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인성을 갖춰야 하는 것 아닐까.


교장 역시 교감 시절의 고단함을 거쳐 그 자리에 올랐을 터인데,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잊은 것인지, 아니면 올챙이의 본분조차 제대로 겪지 못한 채 몸만 개구리가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굽어살필 줄 모르는 리더 밑에서, 오늘도 현장의 교감들은 고독한 싸움을 이어간다. 형평성을 잃은 명단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공정함을 향한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 되어버리는 이 척박한 소통의 온도다.


나는 오늘 다짐한다. 훗날 내가 선 자리가 더 높아지더라도, 결코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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