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엔 이미 너무 많은 다짐이 들어 있어서

퇴직을 앞두고 마주한 '시 처방전', 계획 없는 삶이 주는 뜻밖의 평온

by 해림

어제는 우리 학교 국어과의 공개수업을 참관했다. 교과서 단원은 '문학과 만나는 시간'. 수업 주제는 흥미롭게도 '시 처방전 쓰기'였다. 아이들이 각자의 고민을 적은 쪽지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면, 그것을 받은 친구가 적절한 시를 검색해 처방전으로 선물하는 방식이었다.


수업을 시작하며 선생님은 자신이 고른 시를 화면에 띄웠다.

유병록 시인의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였다. 선생님은 먼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무 많은 계획과 할 일들 사이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를 들으며, 나는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처방전을 받은 듯 폭풍 같은 위로를 느꼈다. '어쩜 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아시고 교장을 위한 시를 고르셨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퇴직을 불과 1년 6개월 남겨둔 요즘, 나는 알 수 없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수많은 계획을 세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지금까지 휴식도 없이 심장이 터질 듯 달려왔건만, 이제는 박동수조차 일정치 않은 심장을 안고 또 무엇을 더 해보겠다고 몸부림을 쳤던가.


'대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자책이 머릿속을 스쳤다.

공개수업 참관을 마치고 나오며, 나는 이 나이에 비로소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잡았다. 예순이 넘어서도 십 대 청소년처럼 시 한 편에 마음이 요동치는 게 신기하면서도, 제정신을 차리게 해 준 국어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래, 아무 다짐도 하지 말자. 널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내일을 맞으면 그뿐이다. 매일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기어이 이루어내야만 했던 과거는 이제 잊기로 했다. 설마 계획이 좀 없다고 인생이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남은 시간은 그저 폭염과 폭우조차 사랑하며 이 여름을 순하게 보내려 한다. 국어 선생님의 말씀처럼, 시 구절 속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 조용히 읊조려 본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유병록)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 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0화몸만 개구리가 된 교장에게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