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키지도 않은 파김치를 담그고서

파김치와 바꾼 방학 첫날의 휴식

by 해림

여름방학 첫날이다. 나이 육십이 넘은 교장도 방학이 되니 아이들처럼 마음이 설렌다. 학교로 출근은 해야 하지만, 그래도 방학은 방학이다.


680명이나 되는 학생과 선생님들이 당분간 내 눈앞에 없다. 식구들을 모두 여행 보내고 나 혼자 홀가분하게 집을 지키는 기분이랄까. 사실 오늘부터 거제도 호텔에 1박 2일 예약을 해두었었다. 하지만 TV 속 물난리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폭우와 폭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두고 공무원으로서 마음 편히 떠나기가 어려워 결국 예약을 취소했다.


여행 대신 선택한 일상도 아침부터 분주했다. 피아노 연습을 하고 집 청소에 사우나까지 마쳤다. 그러다 동네 야채가게를 쓱 둘러보는데 큼직하게 묶인 쪽파 한 단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단에 8천 원, 묶음이 꽤나 실했다.

저걸로 파김치를 담그면 여름내 입맛 없을 큰딸도 주고, 8월 초에 올 임신한 작은딸에게도 고기 구워 곁들여 먹일 수 있겠다 싶었다. 다듬느라 손가락 고생 좀 하겠지만, 뒷일 생각 안 하고 덜렁 사버렸다.

내용의 흐름은 유지하면서, 요리 과정을 훨씬 경쾌하고 간결하게 줄여보았습니다.


단배추 두 포기까지 덤으로 얹어 낑낑대며 들고 왔다. 역시 욕심이 과했나 보다. 쪽파를 다듬고 나니 허리가 꼿꼿이 펴지질 않는다. 단배추는 소금물에 담그고, 쪽파는 멸치젓갈로 숨을 죽였다. 마늘, 홍고추, 땡고추를 간 것에 젓갈과 고춧가루, 매실액, 밀가루 풀을 넣어 휘리릭 버무렸다. 모자란 간은 소금으로 잡고 통깨로 마무리.


그런데 웬걸, 정말 신기하게 맛있다. 나는 이제 요리에서만큼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나 보다!


눈대중으로 대충 넣어도 양념들의 케미가 환상적이다. 단배추김치와 파김치 두 통을 김치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으니, 식량 창고를 꽉 채운 다람쥐처럼 배가 불러왔다. 맛있게 먹어줄 식구들을 생각하니 아픈 허리도 참을 만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하루 종일 불만 없이 즐겁게 일해놓고, 저녁에 퇴근한 남편 얼굴을 보니 불쑥 짜증이 났다.


"방학이라고 하루 집에 있어 봤자, 쉬지도 못하고 일만 했네!"

누가 시켰나? 파김치를 먹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남편은 아무 죄 없이 내 허리 마사지를 해주느라 용을 썼다. 그래도 김치통을 가득 채울 때 느끼는 이 풍족함이란. 중독성이 너무 강해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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