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삶을 잡아먹지 않도록

by 해림

지난 3년간 한글 서예를 배워온 남편이 드디어 대회에 참가했다. "한 번쯤 입선은 해야 주변에 '입춘대길'이라도 써줄 수 있지 않겠냐"며 짐짓 허세를 부렸지만, 남편은 은근히 수상에 대한 부담감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서예에 있어 남편은 확고한 개똥철학이 있다. 보는 사람도 잘 알아먹지 못하는 한자는 쓰지 않겠다며 오직 한글 서예만 고집한다.


가르치는 선생님을 고를 때도 까다롭다. 이전 선생님은 야단만 치고 사소한 것까지 지적한다며 투덜대더니, 현재 주민센터 선생님은 진도를 팍팍 빼준다며 꽤나 만족해했다. 취미로 즐기겠다면서도 상은 꼭 타야겠다는 앞뒤 안 맞는 열정을 보며 나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회 날, 남편은 지나치게 비장했다. 강당 바닥에선 글을 못 쓰겠다며 커다란 밥상에 두툼한 방석까지 챙겨 들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밥상 앞에 앉아 정성을 다해 붓을 놀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낙담한 남편에게 나는 평생 문인화를 그리셨던 친정어머니 이야기를 꺼내며 위로를 건넸다. "초야에 묻힌 고수가 되는 게 어때요? 취미가 즐거우면 그만이지, 상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남편도 수긍하는 듯했지만 기가 죽은 모습에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사실 나는 취미가 자칫 '죽기 살기'의 과업이 되는 과정을 너무나 잘 안다. 어머니는 퇴직 2년 전부터 시작해 아흔한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30년 넘게 문인화를 그리셨다.


천부적인 재능파는 아니었으나, 그 인내심만큼은 어떤 화백도 백기를 들 만큼 대단했다. 어머니는 열 곳 이상의 협회에서 초대작가로 등극하셨다. 대회가 있을 때마다 출품비와 표구비를 내셨고, 30년간 쏟아부은 재료비와 수강료만 합치면 아마 억대에 가까울 터였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도 보행기에 의지해 화실을 다니셨던 어머니. 하지만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수십 개의 상장과 족자들은 주인이 떠나자 갈 곳 잃은 유물이 되었다.


몇 년 전 이사를 하며 어머니는 애지중지하던 작품들을 보며 "모두 버리라"라고 하셨다. 평생 배우는 중이셨으니 과거의 작품이 성에 차지 않으셨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신의 유품이 자식에게 짐이 될까 봐 미리 마음을 정리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화선지의 내구성을 고려해 몇 점만 사진으로 찍어 보관 중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맞는 첫 번째 여름이다. 어머니는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 수십 개의 부채를 그려 자식과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노인이 하기엔 너무 고된 일이라며 내가 잔소리를 퍼부어도, 어머니는 굽은 등을 웅크린 채 부채를 만드셨고 보행기를 끌고 우체국에 가셔서 직접 부쳐주셨다. 이제 어머니는 계시지 않지만, 내 손에는 어머니가 용을 쓰며 만드신 부채가 남았다.


나는 남편에게 일침을 놓았다. "우리 엄마처럼 서예에 중독되려고 그래요? 엄마가 노년에 그림보다 건강에 조금만 더 신경 쓰셨더라면 그렇게 일찍 가진 않으셨을 텐데.


취미에 목숨 거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그저 삶이 풍요로워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어요." 다행히 남편은 이제 대회에 연연하지 않고 쉬엄쉬엄하겠다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남편은 아흔한 살까지 장수하신 장모님을 두고 아직도 아쉬워하느냐며 나를 효녀라 치켜세웠지만, 나는 어머니를 보며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퇴직 후의 취미가 남은 삶을 지나치게 잠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취미는 나를 돌보는 시간이어야지, 나를 갉아먹는 과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밤, 내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머니의 부채 하나를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수백 점에 달하던 어머니의 작품이 도처에 흔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제 단 하나뿐인 이 부채를 가만히 응시하니 어머니의 솜씨가 결코 예사롭지 않았음을 새삼 발견한다.


부채 속 대나무 잎들이 금방이라도 서글서글하게 흔들리며, 내게 시원한 대숲 바람을 몰아다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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