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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Sep 02. 2021

소설의 위로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소설 속 주인공이 책을 읽거나,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장면 같은 부분이 묘사되면 몰입도가 높아진다. 내가 직접 읽어보거나, 그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야말로 소설 속에 ‘풍덩’ 빠진 느낌이랄까나. 만약 누군가 자신을 소개하는 어떤 한 단어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책'을 고를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으면서 아오이가 목욕탕에서, 거실에서 책을 읽는 모습에 푹 빠졌다. 대학생 때 빠진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꼭 책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어 어떤 제목이든 늘 읽고 싶었다. 출산 이후 육아로 한동안 단절됐던 책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준 것 또한 책 속의 책이었다. 그렇게 만난 건 <시선으로부터>의 김난정이라는 인물이다.


"원래도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우윤이 아팠던 시기와 겹쳤다. 대학병원의 대기 시간은 길었고, 난정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 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우윤의 병이 재발할까 봐, 혹은 다른 나쁜 일들이 딸을 덮칠까 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 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키워놓았더니 미국으로 날아가버렸지, 내 딸.. 난정은 우윤이 보고 싶어 내내 우는 대신 계속 읽었다.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 딸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웠다."


 나와는 조금 다른 처지에 있는 난정의 이야기이지만, 육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나 역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자기 보호법"을 택한 건 난정과 같았다. 나는 소설과 에세이만 읽었는데 난정은 온갖 분야의 책을 읽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의 독서법이나 독서 취향을 따라 하는 것에 매우 흥미가 있어서,  난정의 독서 세계를 보고 다른 분야의 책도 찾아보고 싶게 했다. 책 한 권도 겨우내 읽어오다가 <시선으로부터> 속의 김난정을 만나고 책 읽기의 활력을 얻었다. 나는 쌓여가는 책의 궤적을 따라가며 육아에서 어두워진 마음의 터널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난정이 자식을 다른 나라에 유학 보내거나 이민 보낸 다른 부모들을 좀 만나봐야겠다 생각하는 동시에 떠올린 건 "책이 있을까?"였다. 세상엔 온갖 주제에 대한 책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되는 일이라고. 나도 궁금한 게 생기면 무조건 도서관에 갔다. 주로 책에서 나오는 책들을 따라 읽어 독서목록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가끔은 주제별로 분류된 코너에 가서 제목과 목차만 보고 책을 읽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우연히 고른 책이 취향과 필요에 딱 맞는 순간이 있을 때 쾌감을 느꼈다. 독서에는 탄력이 더 붙었고, 도서관에 가는 횟수도 늘어갔다.


 책 속의 인물들은 심시선 할머니의 10주기 제사를 위해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한다. 한 달 동안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란 의미는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다. 누군가에게는 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이기는 파도에 대한 도전,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최고의 커피,  정신적인 굶주림에서 눈을 뜨게 해 준 핫케이크, 새를 좋아하는 아이가 발견한 세상, 다이빙을 하며 들여다본 바닷속 세계. 하나같이 전부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이 소설이 나를 위로해준 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들의 섬세한 묘사와 여행법 때문이었다. 코로나와 신생아 육아가 겹친 시기 즉,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내 삶만 제일 힘들다 느끼고 있는 시간에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건 마음에 틈을 넓히는 일이었다.  잠의 세계로 빠져든 화수가 팬케이크 사장님을 만나는 시간, 명은이 화산을 보러 갔다가 식물학자에게 꽃을 선물 받는 시간, 지수가 체이스를 만나는 시간, 내가 마치 그들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여러 주인공들이 관심 있는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는 방식이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좋았다. 함께 여기저기 둘러보며 여행을 다니는 기분이라 할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정세랑 작가 정말 최고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13명 이상의 주인공들의 직업과 관심사까지 모조리 다 취재하고 조사해서 쓴 것일 텐데, 허투루 쓴 흔적이 없다. 사실을 바탕으로 섞은 적절한 묘사로 인해 그들의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세랑 작가의 책들을 다 찾아 읽다가  <잡스: 소설가>라는 매거진 B에서 발행한 인터뷰집을 봤다. 이 작가의 글이라면 읽고 싶다, 책을 찾아 읽자, 독서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자료 조사를 많이 해요. 있는 대로 다 끌어모아요. 주로 책이나 기사 혹은 다큐멘터리지만, 종종 공공 비치 자료 같은 것도 읽습니다. 대여할 수는 없지만 전문 연구 요원들이 기록해둔 좋은 자료가 많거든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서울역사박물관을 특히 좋아해요. 인터뷰도 매번 하고요. 관심이 가는 직업을 가졌거나 특이한 경험을 하신 분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요. 사실 인터뷰한 걸 많이 반영하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알고 쓰는 것과 모르고 쓰는 건 다르니까요.


 책을 다 읽고 다시 읽어보고 싶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어도 좋다. 첫 번째 방법, 매 챕터 앞부분은 심시선 할머니의 글이 단편적으로 나와있는데 여기만 골라 읽어도 좋다. 두 번째 방법,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고른다. 그 인물의 여행기를 따라 읽어도 좋다. 세 번째 방법, 구글을 켜놓고 검색해가며 읽어도 좋다. 이외에 자신이 생각한 기발한 방식으로 읽으면 더 좋다. 그렇게 읽는 동안  소설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시선으로부터>(2020) |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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