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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Oct 14. 2021

'뜸'의 시간

<식탁의 위로> 최지해

 2년 전 아이를 낳았다. 인생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아이가 혼자 걷거나 밥을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 아이와 나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남편은 한결같은 사람이라 연애할 때부터 신혼 기간 1년 남짓 싸운 적이 없었다. 내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요리를 하지 못해도, 실수를 해도 다 괜찮다고 ‘허허’ 하고 웃는 사람이다. 결혼한 지 4년 차이지만 여전히 다정한 문자를 보내고 자신이 피곤한 날에도 눈을 비비며 ‘잘 잤냐’고 물어봐준다.


 아이가 태어난 뒤 우리 둘 사이에 생긴 문제는 ‘속도’였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지만, 육아를 같이 하는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속도를 보면서 종종 화가 났다. 아이한테 화를 낼 수 없으니 남편에게 대신 화를 낸 것도 있었을 것이다. 울음으로 이것저것 요구하는 아기의 욕구를 들어주려니 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느낌이었고 함께 있는 남편도 내 마음처럼 움직여줬으면 했지만, 남편은 태생이 느긋한 사람이었다. 성격이 급해 일처리가 빠른, 그래서 흥분도 잘하는 나와는 그런 점에서 달랐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남편이 이런 나를 다 받아줄 수 있는 속도를 가졌기에 우리가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15개월 이후부터 계속 잔병치레를 했다. 감기가 다 나았다 싶어 잠깐 바람을 쐬면 또 감기에 걸렸고 장염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병원을 가기 전에 어플(일명 ‘똑딱’)로 예약할 수도 있게 됐지만, 대기번호가 60명을 넘기는 절망적인 상황,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갔다 오면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아이는 병원에 가기 전부터, 병원에서 대기할 때까지 온종일 안아달라고 보챘다. 진찰은 고작 2분 남짓, 그러나 주차하고 병원에서 진찰을 기다렸다가 진찰을 마치고 약국까지 다녀오면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아이의 감기가 심한 날은 밤에도 어김없이 아이와 붙어 있어야 했다. 아이를 재우고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기는커녕 샤워할 시간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남편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받고 나름대로 힘든 게 있었겠지만 이런 날에는 남편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아이는 같이 낳았는데, 남편과 나는 이토록 다른 시간을 보내고 다른 속도로 삶을 살아가는 걸까,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짜증 섞인 말투가 되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이 됐다. 다행히 이런 내 모습에 남편은 화 한 번 안 냈다. 내 화를 풀여주려고 예쁜 카페나 맛있는 식당을 알아보고 외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것도 속도의 차이일까.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서점을 간다. 아이를 데리고 서점을 가면 결국 책을 읽기는커녕 매대에 진열된 책 표지 정도만 흘끗 보는 데 그치게 마련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때가 있다. 마음속에 화가 차올랐던 어느 날 서점을 둘러보다 ‘읽고 싶은 것’을 발견한 적도 있다.(이런 걸 애독가 들은 ‘운명적 만남’이라고도 한다) 요리 관련 에세이였는데 요리에서 뜻밖의 심리 치료를 받은 기분이었다.


“다른 것들이 만나면 ‘틈’과 ‘뜸’은 필수다.”

 

그랬지.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존재가 아니었지. 남편과 나는 30년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틈과 뜸이 필요했다. 이 문장은 카레 요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남편의 느린 속도에 화가 날 때마다 이 문장을 되뇌려 한다.


뿌리부터 열매까지 식재료 전체를 먹는 '마크로 비오틱' 요리법을 배울 때의 일이다.
"다른 땅에서 , 다른 기운으로, 다른 농부가 기른 식재료인데, 서로 통성명할 시간 정도는 주는 게 맞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냄비 뚜껑을 열어 보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냄비 안에서 합방할 시간을 주는 거죠."
공교롭게도 그날은 마크로 비오틱 카레를 배우는 날이었다. 냄비에 제일 먼저 양파를 넣고 오래도록 볶다가 톡 쏘는 아린 내가 사라지면 다음 재료를 넣는다. 그리고 익은 채소가 뒤섞인 달큼한 '그 냄새'가 나면 다음 재료를, 그리고 또다시 다음 재료를 넣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뚜껑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이들이 잘 어우러진 냄새를 기억하세요. 집마다 식재료와 집기가 달라서 뚜껑을 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 냄새가 나는 순간... 지금이에요! 이리 와서 얼른 맡아봐요." 
                                                                                                                <식탁의 위로> 최지해 


남편과 나, 아이 모두 다른 존재이다. 각자 다른 사람이 만나 한 집 안에서 살아가려면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못 기다려준 건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닐까. 오늘은 마크로 비오틱 요리법에서 가르쳐준 카레를 만들어 가족과 함께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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