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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Feb 23. 2022

안아주기

22.02.23

 나는 아이에게 단 것을 주지 않으려는 편이지만 달콤함이 특별한 경험이 되는 순간은 예외다.


아이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자주 놀러 간다. 꼭 책을 사지 않아도, 어른 책과 아이 책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고 아이 입장에선 장난감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넓은 매장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겨울바람이 차가운 어느 날, 하원하고 차를 태워 영풍 문고에 갔다. 서점에 놓인 그림책은 비닐로 씌워져 있어서 내용을 볼 수가 없다. 표지만 보고 내용을 상상해본다. 아이는 전면 책장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책들을 보다가 "곰이 지금 뭐 먹어요?"라고 물어본다. <초코가루를 사러 가는 길에> (2018, 박지연, 재능교육)이었다. "글쎄 뭘 먹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책이 있나 검색해본다. 아이는 서점에서 관심을 가졌던 책을 빌려다 주면 대부분 기억하는 편이다.

 책을 빌려와서 아이에게 짜잔 하고 내밀었다. 하원하고 새로운 책이 서재에 놓여 있으면 한참을 앉아 책 먼저 본다. 그날은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나도 앉아 함께 읽었다.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초코차를 좋아하는 곰이 친구들과 나눠마신다는 내용이다. 처음 읽을 때는 그 내용이 전부였다. 불현듯 아이에게 "초코차 한번 마셔볼래?"라고 물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는 당연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어린이집에서 초코맛을 이미 봤겠지만 공식적으로 집에서 처음으로 주는 초코이다. 따뜻한 그림과 글, 거기에 달콤함을 느낀 추억이 결합된다면 책이 계속 읽고 싶어 지겠지.

 그날 이후부터 아이는 <초코가루 사러 가는 길에> 읽어달라고 한다. 속뜻은 초코차를 먹고 싶다는 것이다. 기꺼이 우유를 유리잔에 따라 30초가량 데워주고 코코아 가루를  저어준다. 초코차가 만들어지는 귀한 장면을 아이는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의자를 끌고 가져와 "엄마가 뭐하는지 봐야지." 한다. 의자 위에 올라가는  위험하지만 기쁜 마음을 안전이란 이유로 끌어내리고 싶진 않아 그냥 둔다. 아이의 책상 위에 유리잔을 올려다 주면 작은 의자에 앉아서 초코차를  모금 마신다.  번의 음미 뒤에  "엄마,  읽어주세요."라고 요청한다.  책을 읽어줄 때는 무릎에 앉히지 않고 아이는 책상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읽어준다. 보통은 아이가 책을 넘기기 때문에  속도에 맞게 책을 읽어줘서 글밥을   읽고 지나가는 책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책을 넘길  있는 사람은 나라서 책에 있는 글을 모두 천천히 읽어준다. 초코차 마시는  멈추고 아이는 책의 내용에 집중한다. 동물 친구들이  같이 모여 초코차를 마시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남아 있는 초코차를 마신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읽지 못한 글 안의 의미까지 읽을 수 있었다. 울고 있는 여우, 투덜거리는 돼지, 심술꾸러기 토끼를 마주한 곰은 그저 말없이 안아준다. "조금씩, 조금씩" 동물들은 변한다. 이거, 아이의 모습 아닌가? 슬퍼서 울고 있는 아이, 투덜거리는 아이, 심술 난 아이. 요즘은 자주 그런 아이에게 화를 낸다. 그런다고 아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더 크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행동한다. 그간 피곤한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곰처럼 말없이 아이를 안아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내일은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한 번 안아줘야겠다. 천천히 반복해서 읽는 이야기는 이렇게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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