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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Mar 06. 2022

기획된 좋은 공간

22.03.06

1. "말하지 않아도 행동하게 / 행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새 학기 맞이를 하며 교실 환경을 꾸밀 때 가장 중심에 둔 메시지다. 잘 설계된 공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텅 빈 교실을 바라보면 책상과 걸상만 놓인 공간에서도 아이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작년에 장난감이 몰려 있으니 동선이 겹쳐서 싸움이 났지, 바구니가 여기 있으니까 가정통신문을 알아서 냈지.' 교실에서 보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아이들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졌다. 쌓인 데이터는 새 학기 교실 단장을 할 때 어떤 공간을 만들지 생각하는데 도움이 된다. 


2. 기획자들의 책을 즐겨 읽는다. 좋은 기획은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교실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여러 권의 책에서 '넛지 효과'를 적용한 기획 이야기를 읽었다. 이승희 마케터의 <별게 다 영감>이란 책에 나온 글의 일부이다.


    넛지효과 1 : 네덜란드 자전거 회사가 배달 중 파손 사고를 막은 간단한 솔루션. 패키지 디자인을 티브이가 들어 있는 박스처럼 바꾸자 파손 사고가 80% 감소했다고 한다. 푸시하지 않고 슬쩍 찌르는 방법. 이것이 넛지 마케팅  
    넛지효과 2 :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가면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나는 계단이 있다. “이곳에서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적는 대신, 삐그덕 소리가 나게. 계단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조용히 걸어야겠다고 인식하게끔 했다고 한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좋은 공간에는 좋은 의도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흐름을 따라간다고 한다. 공동체의 흐름을 만들어주는 것, 그건 의도된 공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교실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3. 학급경영에서 생활 목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독서이다. 독서를 하면 똑똑해진다, 공부를 잘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다른 세상을 엿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해보라고 독서를 권한다. 한 번이라도 책의 맛을 볼 수 있도록 교실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럼 우리 교실에서 어떻게 책을 읽힐 것인가? 아침에 등교하면 독서 시간을 줬다. 독후감은 쓰지 않는다. 수업 시작종이 울릴 때까지 책만 읽으면 된다. 칠판에 커다랗게 <아침 독서 : 책 읽기>라고 써두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연히 아이들은 어제 오후부터 보지 못한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삼삼오오 아이들이 모여 교실은 어젯밤 뭐했는지 이야기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앉아서 책 읽어라." 하고 잔소리를 하는 순간 책은 잔소리가 따라오는 도구로 보인다. 몇 년 동안은 잔소리로 이어지는 아침 독서 시간을 보내고 학기말에는 교사도 독서 시간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실험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맞이하는 장면이 교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면 어떨까? 8시 30분이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온다고 하면, 나는 8시부터 교실에 앉아있기로 했다. 밀린 업무와 미처 하지 못한 수업 준비는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았을 때 하기로 한다. 칠판에는 "책 읽기"라고 쓰여 있다. 등교는 아이들이 한 명씩 하기 때문에 책을 펼친 아이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교실은 조용히 독서하는 공간을 유지할 수 있다. 책 읽으라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4. 이 외에도 세심한 관찰과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두가 편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특히 3월에 매일 쏟아지는 가정통신문과 그를 회수해야 하는 교실은 그야말로 잔소리 폭격의 원인이 된다. 가정통신문 누가 안 냈니, 얼른 내라, 누가 걷어와라 라는 말은 교사와 학생의 피로도를 높이는 일 중 하나다. 교실 앞 가운데에 책상 하나를 두고 바구니에 <가정통신문 내주세요>를 붙여둔다. 등교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노란 바구니에 아이들은 가방을 뒤적인다. '부모님이 언제 이걸 넣었지'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들고 나와 바구니에 넣는다.  (종이가 사라지고 핸드폰으로 처리하는 가정통신문이 많아지고 있으니 이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교실에서 좋은 공간은 서로 힘을 들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주의 깊은 관찰로 재배치하고 그렇게 기획된 공간은 좋은 공간이 된다. 


5. "에디팅의 화룡점정은 다름 아닌 '배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자의 독서>, 김도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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