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03.08
나와 다른 건 알고 싶지 않다. 나쁜 건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 않다. A를 생각하고 사는데 A와 반대에 있는 생각을 굳이 알아야 하나 싶다.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아도 시간은 모자란데.
이런 생각들이 바뀌기 시작한 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다. 나는 그림책을 자주 찾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그림책이 좋은 그림책일까 궁금해졌다. 그림책을 소개하는 책을 읽기도 하고, 평론집도 찾아 읽었다. 막상 좋은 그림책을 가려내는 안목을 넓힐 수 있는데 도움을 준 건 ‘작가의 말’이었다. 그림책의 작가 소개말은 학력이나 약력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짧지만 강한 몇 문장으로 책을 만든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 뒤로 작가의 인터뷰를 챙겨서 본다. 그림책을 고를 때 목차 대신 작가 소개란을 읽어본다. 최혜진의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은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집이다. 그림책을 공부하려 펼친 책인데 나의 생각을 점검하고 방향의 각도를 조정하게 만들어준다.
1.
보편적 가치를 담아내려면 많은 경우의 수에 이입을 해봐야 해요. 광주를 생각하면 물론 피해자가 먼저 생각나지만 그곳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우리 공동체에 있잖아요. 여전히 5.18 민주화 운동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한국 사회의 일원이고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씩스틴>>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극우 유튜브를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한국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 최혜진 _ 권윤덕 편,. p.36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로 그림책을 쓰기 위해 극우 유튜브를 들어 봤다는 권윤덕 작가의 말에 책을 덮고 생각에 빠졌다. 그동안 나는 나와 반대의 의견이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들었던가? 반대를 알지 않고 내 의견만 말한 건 아닐까? 무슨 논리로,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노력은 했던가? 꼭 의견이나 이념 같은 거창한 단어가 붙지 않더라도 사소한 일에서도 나와의 다름을 이해하려 애쓴 적은 손에 꼽는다. 내 일도 바쁘고 피곤하고 다른 생각은 듣기 힘들다는 이유로 피해버렸다. 고개를 돌리고 귀를 닫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계속 닫힌 귀로 살았겠지. 글쓰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권윤덕 작가의 말은 귀를 열으라 가르쳐준다. 하나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대편에 있는 논리도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겠구나 깨닫는다.
2.
요즘도 많은 어린이책이 세계를 도식적으로 그려내요. 그림책에 등장하는 동물도 개, 고양이, 곰, 토끼 등 몇 종에 쏠려 있고, 모두 호감 가는 외양으로 도식화되어 있지요. 도식을 취한다는 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에너지를 들여가며 대상을 바라보고 새로이 인식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캐릭터화한 표현, 대상화된 표현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현실 인식도 왜곡될 수 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은 도식을 배반하는 그림이에요. 작가가 자기 눈으로 사물을 본 결과를 그려내는 그림, 고유한 시선이 전해지는 그림을 아이들이 더 많이 보았으면 해요.
<한국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 최혜진 _ 소윤경 편, p.64
소윤경 작가의 그림책은 본 적이 없다. 아마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고르라 했다면 대출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을 책 같다. 나 역시 도식화된 그림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눈도 닫혀 있었던 걸 깨닫는다. ‘에너지를 들여가며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훈련이다. 그림책을 보는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필요한 훈련이다. 나와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 내가 알던 다른 도식을 찾아본다는 것은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지만 안목을 넓히는 일과도 같다. 넓어진 안목은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아는 세상이 조금 더 느슨해지고 풍요로워지겠지 상상해본다. 마음을 고쳐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