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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Mar 21. 2022

프라이팬을 내 것으로 만들기

22.03.20

 무쇠 프라이팬을 샀다. 새로운 프라이팬이 필요했는데, 코팅이 벗겨지면 수명을 다 해 버리고 새로 사야 하는 코팅 팬과는 달리 무쇠 팬은 길만 잘 들이면 오래 쓸 수 있다는 광고에 혹했다. 무엇에 먼저 혹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 나온 오믈렛용 무쇠 팬을 만드는 과정을 읽었다. 책에서 동기를 얻는 나로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 없지 않겠지.

 무쇠 팬을 사기 전 “무쇠 팬 시즈닝”을 검색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탐색했다. 찾은 정보에 의하면 무쇠 팬 전체에 아마씨 오일(아무 오일이나 또 안 된단다)을 바르고 180도 오븐에 2시간씩 6번을 구워주라 한다. 매우 번거로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뭐가 그렇게 좋길래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무쇠 팬을 사용할까, 궁금해졌다. 보통 인터넷으로 물건을 잘 구매하는 편이긴 하지만 무쇠 팬은 무게도 조금 나간다 해서 어느 정도 크기가 나에게 맞을지 직접 무게감을 느껴 보고 싶어 매장에 가서 샀다. 롯지 25인치 무쇠 팬을 골랐다. 이 정도 무게와 크기라면 괜찮겠다 싶었다. 사진만 보고 살 수 없는 감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마씨 오일을 팬 전체에 바르고 180도로 예열된 오븐에 프라이팬을 넣었다. 타는 냄새와 연기가 너무 지독해 창문을 다 열어두고 외출을 했다. 여름에 시즈닝을 한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6번의 시즈닝을 채우고,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팬으로 제일 먼저 한 요리는 튀김이었다. 다음으로 버섯 오일 찜을 했다. 이제 계란을 한번 구워볼까. 시즈닝이 잘 됐는지 확인하는 첫 코스가 계란 프라이라고 한다. 계란을 탁 깨서 무쇠 팬에 올렸는데, 그 결과는 처참히 "눌어붙음"으로 끝났다. 수세미로 무쇠 팬을 빡빡 닦으며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시 아마씨 오일을 칠하고 오븐에 한번 더 구웠다. 몇 번의 눌러붙음을 겪고 다시 기름칠을 하다 보니 무쇠 팬을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했을까.


실제로 해보면 알겠지만, 이 상태로 만들기까지 들여야 하는 시간과 수고가 상당하다. 새 프라이팬은 좀처럼 오믈렛을 만드는 데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런 프라이팬을 달래고 어르고 칭찬하고 협박해서, 간신히 내 것으로 만든다. 일단 내 것으로 만든 뒤에도 사용 후 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조금만 얼룩이 남아도 달걀은 삐져서 예쁘게 미끄러워 주지 않는다. 꽤 까다롭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무라카미 하루키


 아마 ‘프라이팬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문장 때문에 끌렸던 것 같다. 내 손에 익게 만든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과 노력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 지 단순해 보이는 조리도구에서 찾아보려고 했던 걸까. 어찌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시간을 투자한 영역이 요리이다. 요리 도구에까지 의미를 찾으려고 했나 보다.

 한동안 무쇠 팬에 화가 나서 손을 대지 않았다. 쇠로 만든 것이라 통풍이 잘 돼야 녹슬지 않는다는 말에 부엌 한편에 걸어둬서 오며 가며 계속 마주하긴 했지만. 그러다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모든 프라이팬을 다루는 기본을 내가 안 지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구울 재료를 올리기 전에 따뜻하게 프라이팬을 달구는 것. 성격 급한 나는 이 과정을 자주 생략했다. 코팅 팬은 그런 내 성격을 조용히 받아주었지만 무쇠 팬은 아닐 수 있다. 다시 무쇠 팬을 불에 올리고 따뜻해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계란을 터트렸다. 계란은 프라이팬에 떨어지자마자 투명한 액체에서 하얀 고체로 변해갔다. 뒤집개로 살살 흰자와 팬 사이의 간격을 벌려 뒤집는 순간, 눌어붙은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목격했다. 와, 무쇠 팬 하나가 인생을 가르쳐주는구나. 길들이기까지 시간과 노력, 거기에 기다림까지 다 갖춰야 했던 것이다. 무쇠 팬을 만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요리할 때 가장 자주 쓰는 팬이 무쇠 팬이다. 사용 후 관리도 세심하게 처리해야 되긴 하지만, 내 것이 된 무쇠 팬으로 요리하는 것이 뿌듯하다. 기껏해야 계란 프라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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