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6
책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처음 책을 열 때 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작가가 이 책을 왜 썼는지, 책을 쓰게 만든 씨앗은 무엇인지,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 프롤로그를 자세히 뜯어본다. 이 과정에서 작가 가졌던 의문이나 하고 싶었던 말을 함께 품으면 책 속에 풍덩 빠질 수 있다. 책이 품은 질문들은 내 고민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의 내가 좋은 책이라 여기는 기준을 한 단어로 말하면 ‘실마리’다. 내 머릿속에 침잠해 있는 고민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커리어, 좀처럼 펴지지 않는 감정들을 박차고 나갈 동력을 주는 ‘실마리’가 무엇일까.
실마리를 찾아내는 과정이나 방법은 사람마다, 문제마다 각양각색이지만 공통점은 있다. 문제의 해결을 찾기 위해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슴속에 품고 다닌 질문들은 어떤 순간과 만나 해결의 단초가 된다. 권윤덕 작가가 쓴 <나의 작은 화판>은 10권의 그림책을 쓰며 막혔던 문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실마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내가 일터와 도구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P.166)
해결의 실마리를 얻은 것은 의상실에 취재하러 갔을 때였다. (P.167)
<나의 작은 화판> 권윤덕
권윤덕 작가가 그림책을 구상할 때 얻은 작은 발상에서 시작해 취재와 스케치를 거듭하며 질문하고 탐색하는 과정이 꼼꼼하게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 과정이 글로 풀어진 것에 감동했다. 10권의 그림책을 쓰는 동안 작업 노트를 기록했다는 의미일 테니까. 작가님은 기록을 들춰보면서 문제점이 생겼을 때 돌파하는 힘이 무엇이었는지 금방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과정을 읽어 나가는 게 좋다. 실마리를 발견하는 힘과 그 순간을 알게 되면 문제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일으키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작은 나의 화판>에서 얻은 권윤덕 작가의 실마리를 찾는 방법은 스스로 던지는 질문과 취재, 공부였다. 문제를 머릿속에서만 맴돌게 하지 않고 인터뷰하고, 독자들을 만나 책에 대한 반응을 살피고, 공부를 했다. 한동안 무기력에 허우적거린 권윤덕 작가는 과학을 공부하면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사람마다 무기력을 이기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밖으로 몸을 끌고 나가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 것이 인상적이었다. 작가님은 과학 공부 모임이 일단락 지어지던 어느 날 한 과학책의 마지막 장, 에필로그를 읽고 <피카이아>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무기력함 속에 있었지만 그림책이 아닌 다른 세계를 공부해보면서 다시 그림책으로 돌아왔다.
작가님이 쓴 그림책 이야기는 나를 토닥여주면서도 돌파하는 힘을 줬다. 삶의 모든 면이 공부가 될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의 여자아이처럼 나약해 보이지 않도록 운동화를 신고 세상으로 나가본다. 읽고, 쓰고 삶을 기록해본다.